(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24] 벚꽃 엔딩 by 정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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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장련, 음악편집 / 변소화

벚꽃 엔딩

글 / 정춘미

벚꽃 엔딩

얼마 전 뉴스로 동방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를 접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비행기는 모든 교통수단 중에서 가장 안전하지만 사고가 나면 생존율이 가장 낮은 교통수단이기도하다. 사고 첫 날, 기적을 바라는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고 모든 사람들은 그 바람이 현실이 되기를 기도하였다. 하지만 밤낮으로 이어지는 수색작업에도 생존자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동방항공 측은 탑승객 123명과 승무원 9명 전원 사망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였다. 사실 첫날 뉴스를 접하고 사고영상을 본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이다. 8900미터의 고공에서 2분도 안 되는 사이에 추락을 했으니 그 결과의 참담함은 말을 안 해도 뻔하다. 하지만 모두가 탑승객의 가족 또는 지인이 되어 실낱같은 희망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나 또한 너무나 이해하고 공감하는 바이다. 며칠 내내 사건의 진행상황을 수시로 찾아보고 생존자가 없다면 빨리 사고의 원인이라도 밝혀 지기를 바랐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올 때가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제 곧 서른을 맞이하는 내가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기에는 이른 나이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한 사건은 분명 있었다. 때는 아마 2019년 1월 말의 어느 날 자정쯤으로 기억한다.

“언니, 내일 연이 보러 가요?”

“?? 어디?”

“언니 아직 소식 못 들었어요……?”

“무슨 소식?”

“……”

“연이가 어제 저녁에 사고로……”

“!!!???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끝을 흐린 문자에서 뭔가 불길함을 예측했고 그 뒤로도 채팅은 한참 이어졌다. 연이는 대학교 시절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 동생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전날 밤 사고로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나에게 소식을 전한 친구는 연이의 동기이자 똑같이 내가 많이 아끼는 동생이다. 그 친구한테서 소식을 듣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믿을 수 없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를 반복하였다. 결국 사실임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머리가 어디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굳어지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렸다. 어떤 감정인지 말로는 표현이 안 되고 그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장의 주소가 찍힌 문자가 와있었다. 충격은 가시지 않았고 온밤 잠을 설치다가 새벽에 옷장에서 검정색 옷을 찾아 입고 방문을 나섰다. 평소에 워낙 무채색을 좋아해서 검정색 옷을 찾아 입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겨울 새벽이라 워낙 추운 날씨였지만 기분 탓인지 체감온도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장례식장을 가는 내내 무슨 정신으로 지하철을 탔는지도 모르겠고 그 와중에 주머니에 넣은 손은 부의봉투를 꼭 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마침 후배들을 만나 같이 장례식장을 걸어갔다. 맨 뒤에서 걷고 있었던 나는 힘겹게 옮기는 발걸음들을 보았고 가는 내내 정적이 흘렀다. 드디어 도착하여 멈춰선 우리 일행은 아무도 들어갈 용기가 없었고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기만 했다. 그때 정적을 깨뜨린 한마디, “우리 이제 들어가서 인사를 해야 되지 않겠니?” 그제야 하나 둘 힘겹게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입구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는데 올려다보니 장례를 치를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많은 이름들 중 그 이름이 한눈에 들어온 이유는 유일하게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명이인일 거라고 우겨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이름 석자였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그 아이는 졸업하고 국내에서 석사과정을 이어가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올 기회가 생겨 한국의 모 대학교에서 재학 중이었다. 힘든 한 학기를 마무리하고 방학이라 그제야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이런 사고를 당하리라고는 누가 알았을까?! 그것도 타향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조문실이 있었고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가슴 찢어지는 통곡소리에 마음이 저려왔다. 엄마였다! 조용히 줄을 서서 인사를 올리는 조문객들 사이에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보았다. 밝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나오는데, 상주석에 앉아있는 아담한 체격에 얼굴은 그 아이와 너무 닮은 한 중년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봐도 그 아이의 엄마였다.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는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또 가장 절망적인 눈을 보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하는데 “우리 불쌍한 아이 어떡하냐”며 무너지는 모습은 더는 강한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엄마는 모든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딸아이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엄마는 울다가 지쳐 쓰러지면서도 조문객들의 손을 잡고 계속 되뇐다.

“엄마가 저녁 혼자 먹는다고 국 끓여 놓고 나가더니 왜 돌아오지 않았니? 내가 그때 못 가게 말렸어야 했는데…이럴 줄 알았으면 다이어트 한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치킨을 보고만 있을 때 그냥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일 걸…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인줄 아세요? 장학금을 받아서는 방학에 와서 꼭 제 손에 쥐어 주고 가는 아이예요. 엄마는 이제 그런 것 다 필요 없으니 제발 다시 살아서만 돌아와줘!”

부모는 자식의 성공보다도 오로지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가 더 중요하고 어디 아픈데 없는지가 더 걱정이 되는 그런 사람이다. 나 또한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아직도 부모님이 전화할 때마다 묻는 첫마디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는 것이다. 때로는 잔소리처럼 들려 애도 아닌데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부모는 그냥 자식이 아프지 말고 옆에 있어 달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 아이의 엄마도 마음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2018년 9월쯤 명동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도 좋아하고 남학생들과도 잘 어울려 항상 털털한 모습이어서 다들 나를 여장부라고 하는데 우리 엄마는 천생 여자예요. 나는 축구, 농구, 배구 구기운동은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데 우리 엄마는 공만 봐도 도망가거든요. 하하하하!!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엄마를 지켜줘야 할 운명인가 봐요. 하하! 아, 맞다! 그리고 저번 방학에 내가 학교로 돌아가면서 장학금 받은 돈 몇 백원을 장롱에 숨어 두고 나왔거든요. 나중에 전화로 얘기했더니 엄마가 그렇게 좋아할 수 가 없었어요! 하하하!”

워낙 쾌활한 친구라 농담처럼 툭툭 던진 말들이었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 아이는 대학교 시절 내내 반장역할을 맡아하며 반급뿐만 아니라 학부의 모든 문체활동에 빠지지 않고 활약하여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아이였다. 주변친구들이 한창 아이돌에 빠져 있을 때 축구를 좋아했던 그 아이는 나에게 종종 베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축구대회에서 잔디밭을 휩쓸며 다니는 그 아이의 모습은 여자 베컴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준급 축구실력을 자랑했었다. 여자아이가 축구를 좋아하고 또 그렇게 잘하기가 쉽지 않은데 멋지게 활약하는 모습에 다들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리고 나와 그 아이의 인연은 동아리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나의 1년 후배였고 동아리 회원 모집을 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영입한 멤버였다. 평소에는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이지만 재능도 많고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 똑 부러지게 잘 해서 나이는 나보다 어려도 정말로 배울 점이 많은 친구라고 늘 생각했었다.

그날 우리는 명동거리를 휩쓸며 맛집 탐방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쇼핑도 하고 수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대학교에서의 추억들, 그리고 선생님들, 친구들, 교내식당 등등. 졸업을 한지 몇 년 만에 다시 그때를 떠올리니 마냥 즐거웠고 행복했다. 우리는 그렇게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종일 깔깔거리며 헤어질 때까지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한국에 오면 길거리 핫도그를 꼭 먹고 싶었다던 그 아이의 말에 같이 핫도그도 먹으면서 말이다. 그 뒤로도 종종 연락을 했고 그때마다 그 아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우리 학교에 놀러 와서 캠퍼스 투어도 하고 교내식당에서 밥도 먹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한창 졸업논문에 시달리고 있었던 때라 약속을 미루고 미루다 이듬해 4월쯤이면 중요한 논문심사도 마무리되고 조금 여유가 생길 것 같으니 그때 꼭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벚꽃구경도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이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고, 그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다.

별을 담은 너

장례식장에는 급하게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조문객들이 한두 명씩 늘었고 그 아이와 일면식도 없던 일부 동문들도 불의의 사고로 젊은 생명이 이렇게 마감을 짓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발걸음을 해주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점심이 되었고 우리는 학교 선배들과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간단한 식사시간을 가졌다. 사실 나는 매번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이해가 안 되었다. 그저 막연하게 먼 길을 찾아준 조문객들에 대한 예의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눈물은 흘러도 밥숟가락은 올라간다고 산사람은 또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니 식사를 하면서 서로 위로도 하고 마음도 추스르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식사가 마무리되고 좀 지나 입관식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제까지 저녁식사를 챙겨주던 딸이 주검이 돼 돌아온 모습을 본 엄마는 다시 무너져 내렸고 옆사람이 부축해서야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아마 딸아이의 마지막을 꼭 같이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날 유일하게 엄마를 버티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소식을 듣고 중국에서 달려온 선생님들도 한 켠에서 꾹꾹 참았던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처음에는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던 나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동행한 친구의 손을 잡고 같이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내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고 마치 악몽 속에서 헤쳐 나오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하여 우리에게 마음을 추스를 틈도 주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 아이가 이젠 실체도 없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고 알려준다. 허무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수십 번 묻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원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지만 또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복잡한 감정들과 사투를 벌이던 와중에 내 몸은 어느새 납골당으로 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저녁시간이라 지치기도 했고 또 마음이 무겁다보니 다들 조용히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와의 채팅기록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올려도 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기록들. 이제는 더 이어질 수 없는 이야기. 나도 조용히 휴대폰을 꺼냈다.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연락은 못했지만 내가 논문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끔 연락을 해서는 요상한 이모티콘들을 보내며 날 웃겨주던 아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졸업식에는 꼭 참가하여 카메라맨이 되어주겠다며 중국에서부터 카메라를 챙겨온 아이였다. 어찌 보면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도 그 예쁜 마음씀씀이와 따뜻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낯가림이 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이유 없이 나를 잘 따라주었고 항상 살갑게 대해주었다. 이 또한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그 아이한테 유독 마음이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납골당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다들 헤어졌다. 기숙사에 도착한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싶었다. 하룻밤 사이에 팔팔하던 생명이 형체도 없는 한줌의 가루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까짓 논문이 뭐라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상담까지 고민하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가족들이 나에게 아물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 생각하며 한때 부모님을 원망했던 자신도 철없게 느껴졌다. 어르신들이 항상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24살, 이제 막 꿈을 펼칠 나이에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석사과정까지 이어가며 노력하였는데 세간에 본인 이름으로 된 논문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도 참 안타깝다.

그 아이가 떠나고 한동안 약간의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길을 가다가 닮은 모습을 한 사람을 보면 더 쳐다보게 되고 꿈에도 종종 나타났다. 또한 언젠간 그 아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특유의 통쾌한 목소리로 “언니”하며 어깨 툭 치고 옆에 와서 팔짱을 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고 나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고 2주기에는 직접 보러 갈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단단해졌다. 그때 가보니 2년 전에는 증명사진 한장밖에 없었는데 엄마와 찍은 사진들도 추가되었고 친구들이 붙여 놓은 것으로 보이는 꽃들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젠 3년이 지났다. 나도 졸업, 취직 때문에 한동안 방황하다가 이제 좀 안정을 찾나 싶었는데 3년째 이어진 이놈의 코로나도 도통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루에 수십만 명의 확진자가 속출하자 나도 피해가지 못하고 일주일동안 격리를 하게 되었다. 역대급 인후통을 겪으며 다시 한번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때 든 생각이 그 아이가 있는 세상에는 코로나도 없고 고통도 없는 동화속의 아름다운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냐면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그 아이가 SNS에 올린 마지막 메시지가 “힘들다. 투정을 부리고 싶다”였다. 마냥 밝아 보이는 사람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을 수 있고 또 어두워 보이는 사람에게도 밝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을지언정 “나”는 “나”대로 그저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평생 소중한 존재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카톡 선물함을 확인하다가 내가 그 아이의 생일에 케이크 쿠폰을 보내준 기록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 옆에 “미사용”이라고 적혀 있는 문구를 보고 너무 슬펐다. 시간이 흘러도 이런 사소한 흔적들이 추억을 되살아나게 하고 또 그 추억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오래전부터 그 아이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고통과 너무 가까이 있었고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과연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기록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각자 다 다르기에 나는 오로지 내 기억속의 그 아이를 나만의 방식대로 기록해보고 싶었다. 3년이 훌쩍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벚꽃이 만개하는 봄날이다. TV뉴스에서는 3년 만에 여의도 벚꽃길을 개방한다고 방송을 하고 있다. 그 아이와 벚꽃구경을 하러 가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신경이 쓰였다. 내가 가장 즐겨 듣는 노래인 「봄날」의 마지막 가사로 그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추운 겨울 끝을 지나

                                                   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

                                                   꽃 피울 때까지

                                                   그곳에 좀 더 머물러줘

                                                   머물러줘

우리들의 이야기

이별은 항상 슬픈 법.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경우 더 그러하다. 만약 오늘의 이별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이별이었다면 웃으면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고 “만약” 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아이러니와 또 수많은 예측불가의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야”. 백번 맞는 말이다. 지금 당장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우리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걷는 길이 항상 꽃길이기를 바라지만 설사 흙길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크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8.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19.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0.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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