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4] 호주에서 힐링하는 여자 by 리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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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장련, 음악편집 / 변소화

2022년 Caraz컵 세계조선족글짓기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호주에서 힐링하는 여자

글 / 리의정

2017년 중국에 매년 5000명 제한이 있는 워킹홀리데이(working holiday visa) 비자를 따서 2018년 6월에 들뜬 마음으로 혼자 호주로 온지 어느덧 4년이 거이 된다. “우리 들이 사는 이야기” 주제로 글짓기 대회에 참여 하는 기회를 빌어 그 동안의 일들을 회억하면서 잊지 못할 일들과 자신의 감수를 적어보고자 한다.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당시 철없이 들뜨고 겁없이 날뛰던 시절에 내린 어느 순간의 결정이 오늘 날의 결과를 낳은 것이지만 나는 후회 하지 않고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로 놓고 말하면 중국의 변방도시에서 평범이하인 가난한 집안에 태여나서 공부만 하다가 세상 구경하고 싶어 북경의 일반 본과대학교 문과 전업에 붙었지만 대학교 때 어머니를 잃고 삶의 첫 시련을 겪고 나니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고 느껴졌던 나는 졸업하고 제대로 된 직장도 찾지 않은 채 갈팡질팡 헤매고 있었다. 대학신입생 등교일 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경에 혼자 갔어도 적응 잘해서 4년이나 있었고 세상은 혼자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닳았다. 첫 해에 북경의 모 대학 석사시험에 3점 모자라서 떨어지고 좌절하다가 취업에 자신어 없어 공부를 계속한 것이 다음 해에 석사 시험과 동시에 알아봤던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 정보 수집도 같이 했는데 시험을 1등으로 통과하고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금상첨화로 명액 발급날 사이트에서 무사히 신청서를 제출하고 비자신청 자격을 받은 나는 롯도 당첨이라도 된 느낌으로 기회를 잡아 호주 비자 신청을 준비했다. 영어는 워낙 본과 때 6급 넘은 상황이라서 별 준비없이 아이엘츠 시험에 통과했고 열심히 인터넷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꼼꼼히 적어놓고 비자신청 준비까지 무사히 끝맞혔다. 그렇게 당시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기대를 가지고 들뜬 마음으로 북경에가서 비자센터에 서면자료를 진출하고 신체검사까지 마치고 보름뒤에 비자를 발급받았고 석사 공부의 길에 들어섰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갈망했던 미술학 석사 생활이 생각처럼 좋지만 않았고 여러가지 객관적 주관적 원인으로 재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의미를 느낄 수 없었으며 무미건조한 1년 석사공부를 마치고 나니 방황하던 나머지 하루하루가 너무 지겨웠다. 예술로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 치유할수 있을 거란 생각은 현실과 너무 멀었고 미술공부가 너무 어려웠고 주위의 동창생들보다 한참 뒤처진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때 마침 여름 방학을 맞으면서 호주 멜버른 NGV(빅토리아주국립미술관)에서 미국현대미술 전람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석사 전공이 미술인지라 꼭 한번 가보고 싶었고 마침  비행기 티켓이 저렴한 시기를 만난 나는 즉시로 도사한테 청가를 맡고 북경-멜버른 직행 항공기 티켓을 구매하고 트렁크 한개와 여행용 가방 그리고 현금 3000불을 가지고 혼자 호주로 떠났다. 

1. 멜버른에서의 2주여행

내가 호주 땅에 발을 들여놓은 곳은 멜버른이다. 11시간 비행을 마치고 셔틀뻐스를 타고 시중심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7시가 넘어서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공포에 가까운 고독과 짜릿함을 느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갔지만 지도를 보는데 익숙하지 못해 주숙을 잡은 모텔에 전화했는데 영어 대화로 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   마침 중국 여자애가 한명 있어서 카운터 직원이 바꿔 줘 위쳇을 공유하고 자세히 알려준 덕에 모텔까지 걸어와서 체크인 하게 되였다. 그 중국 친구는 자기 이름이  수키라고 인사햇고 자신은 사천성에서 왔는데 워킹호리데이 2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잠시 모텔에 묶게 됐다고 했다. 수키의 도음으로 난 의력서 작성이며 세금번호 은행카드, 프리페이 전화카드 내는 것 까지 끝내고 시작이 순리롭게 되였다. 그리고 이틀뒤에 수키의 소개로 만난 미키라는 절강성에서 온 여자애도 나처럼 미술에 흥취 있었는데 얘기를 나눠보니 통하는 면이 많은 우리 셋은 멜버른 시중심과 여러 명승지 관광을 함께 했다. 제일 인상 깊었고 뿌듯했던 경험이라면 NGV미술관에 온종일 박혀서 세계 유명한 예술가 반고흐, 피카소, 세잔, 모네, 데가, 앤디월홀, 마티스, 달리, 프리다카로…… 등등의 작품을 눈앞에서 본 것이였는데 마음에서 감동의 물결이 거세차게 넘쳐올랐고 뭐라 형용할수 없을 격동으로 며칠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시기 친척 삼촌이 소개시켜준 언니 벌 되는 호주에서 유학하는 젠이라는 여자애가 방학이라 멜버른에 놀러 왔는데 그의 친구 3명까지 하루동안 짧지만 따듯한 시간을 보냈다. 멜버른에서 수키랑 같이 먹었던 매콤한 사천 요리  후이꿔러우, 마파두부, 마라탕이 비쌌지만 제일 맛있었고 대학교 졸업하고 먹지 않았던 깔끔한 육수로 된 란주라면, 생일날에 먹었던 맛은 별로지만 뜨뜬뜨끈한 부대찌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멜버른에서 2주 동안 비록 일자리는 찾지 못했지만 추운 겨울과 반대로 맛나는 음식과 처음 보는 황홀한 광경들 때문에 마음이 한없이 들끓었고 모든게 꿈만 같은 시간이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겨울에 난방이 없는 환경이 나로서는 적응이 안돼서 더이상 버티기 힘들어 비자연장 할겸 호주 동북쭉에 위치한 햇빛의 땅 퀸스랜드주로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였다. 마침 수키의 친구 내외가 쿤스랜드의 한 토마토 농장에서 자리 잡고 있고 슈퍼와이저랑 잘 아는 사이인지라 전화연결 끝에 티켓 난 거기로 가게 되였다. 두명의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퀸스랜드 농장 체험을 시작했다. 

2. 토마토 농장 3개월 체험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1년 기한 있는데 농, 림, 어, 축, 서비스 업에 3개월 이상 종사하면 1년 더 연장해주는 정책이 있다. 전혀 체력로동 일이라곤 해보지 못했던 나에게 농장생활은 고달프면서도 즐거웠다. 수키의 친한 친구인 카이와 그의 안해 쇼리는 중국 사천성에서 왔는데 난 그들과 해변 마을의 2층짜리 단독 주택의 세어 하우스에서 지냈다. 대학교 떄 한족들과 숙사 생활 후로 같이 지내본적이 없었던 나는 처음에는 걱정됐고 불편할 것 같았는데 생각과 달리 인간미의 맛을 제대로 느꼈다. 여자 혼자 외국에서 힘들게 고생한다고 가엾이 여겨서 인지 나보다 서너살 많은 그들은 여러가지로 날 잘 챙겨줬다. 

호주는 농업이 주요 산업의 하나이고 농장주 개인 소유로 인력과 기계화를 결부한 농업생산을 진행한다. 내가 간 토마토 농장은 그 중의 하나로 나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4시반에 일어나서 카이 내외와 다른 인도네시아 화교 신혼 부부와 5명이 한차에 타서 40분이면 토마토 농장에 도착한다. 토마토 밭이 대면적으로 뻗어 있었는데 길게 늘어선 가지들 사이로 빅 머신 한대와 작은 머신 6대가 지정된 곳에서 오가면서 토마토 따기를 하는데 고 운전수 한명, 운전수 양옆으로 토마토를 올려가는 벨트가 있었고 벨트마다 밑부분 바구니 모양의 아구리 양옆으로 평평한 철안장이 있었는데 그 위에 사람이 앉아 토마토 가지쪽으로 몸을 돌려 양손으로 따고 , 그 외에 벨트 웃 부분에 사람 한명이 앉아 미처 떼내지 못한 꼭지를 땄다. 따가운 햇빛에 먼지 투성이라 모두들 모자와 마스크를 사용해서 눈만 내놓고 나머지 부분을 꽁꽁 싸맸다.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사람이 대부분이였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그들은 몸을 내던지고 돈벌려는 절박함과 작은 체구에 손이 무척 빠르고 동작이 잽싸서 나는 웬지 더딘것 같아서 은근 눈치 보였다. 최선을 다해서 토마토를 땄는데도 가끔은 토마토 꼭지를 떼내지 못했다고, 벨트 아구리에 던져넣은 것이 밖으로 떨어져나갔다고 썩은 토마토를 제거 하지 못했다고 지적 받을 때가 있었다. 가끔 밤에 손마디가 시큰거렸고 일이 힘들어서 마스크 사이로 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왜 이곳까지 와서 이리 개고생 하면서 있는지 이해 안될 정도로 서럽고 엄마가 있었으면 내가 지금 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나약해서는 안되고 곤난을 극복하고 직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약함을 극복했다. 

다행인 것이 대부분 내 또래의 20대 초반 젊은이들이였는데 내가 자기들 보다 강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배려 하면서 우호적으로 대해줬고 토마토 따는 도중에도 사기를 돋구는 음악이 울려 퍼졌고 옆에 앉는 짝궁끼리 이야기도 나웠으며 점심시간에는 모여앉아 이런저런 대화로 수다를 떨었고 주말이면 해변가에서 파티를 열면서 고기를 구워먹고 같이 음악을 틀어놓고 춤도 추며 여유를 즐겼다. 대중교통이 편리하지 못해 승용차가 없으면 다리가 없는 것과 같은 지라 카이와 쇼리는 매주마다 나를 태우고 마트에 가서 1주일 먹을 식재료들을 샀는데 한번은 입어 안보고 산 속옷 사이즈가 안 맞아서 쇼리하고 말했더니 다음날 일 끝나고 바로 날 데리고 매장에 간적이 있어서 가슴이 찡해났다. 휴식일이면 5명이서 마을의 유일한 한국마트와 한국 치킨집에도 갔고 차를 몰고 같이 주변의 다른 마을에 놀러가서 맛나는 음식을 먹고 여유를 즐겼다. 카이 쇼리 부부는 갑작스런 이유로 이별 파티를 하고 나서 중국으로 돌아갔고 나도 농장에서 3개월을 마치고 비자연장에 제출할 페이스립 14장을 받은 뒤 시드니로 떠나게 되였다. 

그해 토마토 농사가 잘 되지 않아 계건으로 돈을 지불하는 토마토 농장에서 주급 평균 500불로 돈도 별로 못 모으고 일도 무지 힘들었지만 나한테는 처음 하는 일이였고 자기 힘으로 벌어보는 돈이 였으며 돈벌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뼈속으로 깊이 느끼면서 전에 돈을 물 쓰듯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비자연장을 끝내 한시름 놓고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중 손 꼽히는 시드니를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3. 시드니에서의 뷰티플 라이프

시드니로 떠날 때는 그해 10월 초였는데 딱히 시드니로 정한 이유는 동양인들이 많고 대중교통이 발달됐으며 2개월 뒤에 있게 될 매년마다 진행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새해 맞이 불꽃놀이 때문이다. 대도시에 집세가 비싸고 교통비와 외식, 쇼핑의 유혹에 돈이 모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드니로 갔다. 

처음 시드니에 갔을 때는 토마토 농장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어서 그 나마 너무 외롭지 않았고 페이스북에서 시중심과 20분 떨어져 있는 새어 하우스를 찾고 신발가게 세일러 직업도 찾았다. 신발 파는 일은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생각보다 쉬웠고 40대 중반의 중국 절강성에서 온 핼런 이라는 매니저  언니가 잘 챙겨줘서 스트레스도 거이 없었다. 직원들은 20대 초반의 학생비자로 여기로 와 몇년씩 된 동남아 여성 들이였는데 그 들과 잘 어울리면서 같이 외식도 하고 구경도 다니면서 즐겼다. 신발 사이즈 수치가 영국식이여서 중국/유럽식 사이의 전환을 기억해야 하는데, 예를 들면 남자 사이즈 10호 (중국/유럽식 44호), 여자 사이즈 7호 (중국/유럽식 38호) 이다. 내가 유일한 중국 직원인데가 중국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해서 서양인 고객외에 영어를 모르는 중한 고객들을 접대할 수 있어서 보스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내가 주로 출근하던 매장이 제일 큰 매장이고 다른 분점에 매니저는 한이라고 부르는 한국 여성이였다. 어쩌다 가끔 분점으로 지원가게 되면 한이랑  한국어로 대화도 하고 두분 매니저가 사이가 좋아서 모임을 자주 했는데 중식집이나 한식집을 번갈아 다녀서 나는 입이 늘 즐거웠다. 시드니 시중심에 아시아 음식점들이 아주 많았는데 전에 농장에서는 어쩔수 없이 매일 밥해 먹던 시절과 다르게 외식을 자주 해서 중식, 한식 외에, 일식 그리고 중국에서는 먹어본적이 없는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 음식을 먹어보고 나서 반해 버린 나는 새로운 맛의 세계로 들어섰다. 시드니의 편리한 교통덕에 매장 직원들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 블루 마운틴,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어촌 마을 왓슨 베이, 인생샷을 즐길수 있는 더 그라운드 오브 알렉산드리아, 호주 최대의 스키 리조트 패리셔 블루 스노위 마운틴을 다녀왔다. 

신발가게를 3개월 나가다가 매니저 핼런의 추천으로 시교에 있는 창고의 사무실로 오피스직을 가게 되였다. 비록 멀어서 뻐스 두번 갈아타서 출퇴근 시간이 긴 것이 흠이였지만 앉아서 컴퓨터로 하는 일이라 신체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그 대신 시급이 낮고 소비가 심해서 투잡을 결심한 나는 시중심과 멀리 떨어져 지하철을 타고 30분 가야 되는 한국 불고기점에 저녁 알바를 다니게 되였다. 워킹호리데이로 온 한국 직원과, 대만 직원들 그리고 주방장은 중국 심양에서 온 이모였다. 매주 사흘 15시간 정도 일했지만 일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당시 시드니에 학생들과 사장은 30대 중반인 남자였는데 인심이 좋은 편이여서 일 끝나고 나면 직원들 같이 불고기 파티 아니면 한식으로 주었다. 주방이모가 요리 솜씨가 좋았는데 직원이 여러명 바뀐 상황에서 내가 오래 일했고 고향 사람이라고 맛있는 한식을 많이 만들어 줬는데 나한테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휴일 빼고 토요일 휴식외에 하루 8시간 이상 바쁘게 일했지만  당시 25살이였던 나로서는 힘든 줄 모르고 너무나도 보람차고 즐거웠던 나날들이였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필수 항목들이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새해 맞이 불꽃놀이, 스카이 다이브가 빠질수 없는데 나는 시드니에서 이 두가지를 실행했다. 호주에 온 첫해 마지막 날 시드니 달링 항구와 오페라 하우스 앞 해면에서 100여만 세계각지에서 온 관객이 모인 가운에 저녁 9시와 밤 11시 50분부터 10분간 경쾌한 음악과 함께  불꽃구경을 하게 되였다. 인산인해로 붐비는 와중에도 신나서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 모두들 그 순간 만은 모든 고민과 번뇌를 잊어버린채 분위기는 환희로 들끓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3말월에 비자연장 신청에 성공한 나는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큰 맘먹고 400불 지불하고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스카이 다이브를 예약했다. 날자가 다가오면서 무섭기 그지없었지만 사무실 매니저와 직원들의 고무로 안심되면서 스카이 바이빙을 할 흥분된 마음에 흥겹기만 했다. 아침에 출발해서 1시간 가량 가서 워룽공 목적지에 도착하니 대부분 젊은 중국 관광객이였다. 체크인하고 중국 친구들과 점심 먹고 오후 2시가 되여서야 내 차례가 되였다. 직원이 옷과 장치들을 세팅해주고 함께 뛰여 내릴 코치가 와서 인사를 나누고는 녹화를 시작했다. 직승비행기에 앉아 코치의 몸앞에 단단히 묶여서 18000인치 (약 5486미터) 상공에 올라 문이 열리는 순간 하나 둘 셋 하고 뛰여 내리는데 맨 안쪽 승무장 뒤 편에 앉은 나는 젤 마지막이였다.  높이 오를 때 까지도 신나던 나는 긴장돼서 웃음이 사라지고 눈을 질끔 감은채 숨을 머금고 코치와 함께 뛰여내렸다. 바람의 힘에 생각외로 실중감이 심하지 않았고 안경을 끼고 있어서 눈을 뜨고 있었다. 5분 추락끝에 락하산이 켜지면서 허공에 뜨게 되자 살았다는 느낌에 환성을 질렸다. 락하산을 조종해보고 바다를 내리보고나서 알려준 자세대로 무사히 착륙하고 녹화와 사진이 담긴 USB와 기념장을 받았다. 그 외에도 시드니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NSW국립미술관에 시간 나는대로 자주 다녔는데 무료 입장이여서 나로서는 그 곳이 천국이였다. 모네와 피카소 등 외국 유명화가들의 작품, 호주 원주민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외에 신인 화가들의 전시회와 공모전, 각종 미술경연이 자주 있어서 나한테는 완벽한 힐링장소였다. 

워킹홀리데이 두번째 해에 들어서면서 호주 정부가 새 정책이 나왔는데 농장에서 6개월 이상 일하면 또 1년 연장시켜서 총 3년 비자를 주는 것이였다. 마침 고향에 고중때부터 친한 친구가 결혼식을 하게 돼서 나는 시드니 생활을 접고 복학할겸 중국으로 들어갔다.  2학년 상학기 수업을 듣던 4개월 동안 호주에 있던 즐거운 기억들이 내 마음을 간지럽혀 겨울방학이 되기 바쁘게 휴가를 즐길 겸 졸업논문 주제도 정할 겸 호주에 다시 오게 돠였다. 

4. 즐거웠던 농장생활과 사랑스러운 친구들 

2020년 1월초, 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알려지기 바로 며칠전 호주로 왔다. 지금도 굳이 방학 2개월을 보내려고 호주로 왔을거란 생각보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따랐고 어쩌면 하늘의 뜻이였는지 모른다. 내가 다시 농장을 찾은 이유는 새 정책하의 1년 비자연장도 있겠지만 수키가 강력 추천하던 농장이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자리가 없어 못 들어갔는데 무심코 보스한테 문자 한번 보내서 물어봤더니 나한테 회답 전화가 걸려와서 사람 모집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믿고 찾아간 곳은 퀸스랜드주 남회귀선 부근의 가정에서 운영하는 고구마 농장이였다. 

농장에는 저렴한 단독 숙소도 제공해서 주말에 쇼핑하러 타운으로 가는 외에 돈 쓸 일이 없어 돈 모으기는 좋았다. 하루 일과는 봄부터 가을 시즌에는 아침 7시 부터 저녁 5시 까지 9시간 일이였는데 오전에는 실내에서 고구마 포장, 밭에서 묘목 자르기, 오후에는 묘를 심기, 고구마 파내기, 겨울에는 심기를 제외하고 하는 일은 같았다. 코로나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호주도 남부 시드니가 속해 있는 NSW주, 멜버른이 속해있는 빅토리아주는 심해져서 갈 엄두도 못 냈고 퀸스랜드주는 그나마 브리즈번과 골드코스트 두개의 큰 도시에 몇명 케이스를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그렇게 고구마 농장에서 거이 2년 남짓이 있었는데 정말로 많은 추억을 쌓았다. 여기서 내가 언급하고 싶은 사람들은 농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과의 잊지못할 순간들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인가 보다. 아마도 호주에서 제일 좋은 농장이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곳이였고 나는 여기서 좋은 보스, 좋은 친구들, 그리고 남자친구도 만나게 되였다. 농장 보스와 매니저는 호주 사람인데 인심 좋은 분들이였고 슈퍼와이저 부부는 중동에서 온 알리와 제바, 마음이 따뜻하고 직원들한테 얼굴 붉힌적이 없는 사람이여서 나는 아마도 정을 붙이고 오래 있었던 것 같다. 농장에는 타운에서 유학을 하면서 일하러 다녔던 중국 무순에서 온 한족 커플 배리와 앨리스가 있었는데 시원시원하고 통쾌한 동북사람이였다. 그리고 분위기 메이커여역을 하는 막내 이스라엘에서 온 19살 소년 애란,  30살이던 듬직한 큰형님 같은 이탈리아 남자 마르코, 내 또래의 친구들은 이탈리아 남자 니콜라와 토이기에서 온 여자애 세린 커플, 이탈리아 화교 에리코와 일본 여자애 마이 커플, 칠레 남자 디아고와 페루 여자 카밀라 커플, 그리고 반년 뒤에 합류한 중국 동북에서 온 나의 남자 친구 제이, 중국 하남성에서 온 한족 친구 리크와 홍콩에서 온 30살된 친구 홀리, 독일 커플 서저스와 제시카였다. 그 들외에 프랑스 사람과 베트남 사람들 등등 있었다. 주말에는 농장에서 장작을 패서 불을 붙여 바비큐 파티를 했었는데 뭇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오디오에서 울려 퍼져 나오는 노래소리와 모닥불 주위에 모여 앉아 구워먹었던 양갈비, 소고기, 소시지는 그렇게 별맛이였다. 처음 먹는 모닥불 바비큐, 우노 케임, 춤놀이가 인상적이고 흥쾌했다. 그 외에 휴식일에 함께 놀러 갔던 주변의 호숫가에서 다이빙, 철도어구의 맥주집에서 스테이크와 같이 마셨던 시원한 맥주, 보스가 키우던 소를 잡던 날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됐던 우리는 칼잡이 남자들과 주방에 꽉 들어찬 소고기를 나누었을 때, 비오는 날 발이 빠져들어가는 밭에서 온몸이 흠뻑 젖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고구마 묘를 심던 기억, 떠나가는 친구들을 위해 이별파티를 하면서 울며 부등켜안고 작별인사를 나누던 그 때…… 성숙되어가는 과정의 아픔과 보람을 느끼면서 코로나가 휩쓸어 모두들 힘들던 시기, 비록 세계 각지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이런저런 이유로 호주 농장에서 만난 우리는 인간미가 넘치는 곳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희망찬 미래를 그려갔다. 

호주에 와서 도시에 있으면 괜찮은데 작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이 매일 자기절로 밥을 지어먹어야 해서 반찬이 항상 고민됐다. 농장에서 한식을 먹고 싶을 때면 인터넷에서 요리를 검색해서 레시피를 적어두고 자주 만들어 먹었는데 타운에 중국 마트 한 집이 있어 매주 1회 들러 고추장, 된장과 여러가지 조미료를 사놓았다. 그래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만드는 재미에 퇴근하고 저녁은 한 두 시간동안 주방에서 분주히 보냈다. 처음 배추김치를 만들어 먹었는데 중간 이상의 맛이였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그래도 김치요리를 먹을수 있이서 너무 다행이였다. 중국에 있을 때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맘껏 배달시켜 먹던 일이 떠올라 고향 음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자 앨범을 뒤져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중국 친구들이 나한테 한국 식품 포장지 설명을 물어보면 기꺼이 설명해주고 비빔밥과 부대찌개 레시피, 김밥 만드는 것을 가르쳐줬을 때, 신라면을 즐겨 먹는 중국 친구들과 외국 친구들을 보면서 한식의 매력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꼈다. 한번은 내가 비자연장에 필요한 신체검사하러 다른 도시로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배리와 앨리스는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기차역 까지 실어다 주고 마중해줘서 내가 고마운 마음에 닭볶음탕을 만들어 맛잇게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명절 때면 다른 중국 친구들 모두 집에 초대해서 모임을 가질 때도 한식을 즐겨먹는 그들을 위해 나는 닭갈비나 떡볶이를 만들어서 다 같이 즐겁게 먹었다. 

비록 지금은 농장을 떠나 모두 갈라진 우리들이지만, 기억이 떠오를 때 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나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언제 어디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고마운 농장 보스 덕분에 난생처음 그림을 2점 팔어서 현금을 손에 들고 입이 귀에 걸렸던 일, 작지만 아늑했던 방에서 새벽에 일어나 졸업논문 쓰고 답변까지 했던 그 곳이 잊을 수 없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되였고 힘들고 고달펐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 때가 가끔 그립다. 

5. “호주 심장”까지의 도로 여행 

워낙 도로 여행은 나의 계획 속에 없었는데 농장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고 나서 어쩌다 보니 여행길에 들어섰다. 제이하고 농장에서 서로 정이 들고 믿음이 쌓인 우리는 나의 졸업논문 자료수집을 목적으로 농장을 떠나 당시 논문이 종체로 써지지 않았을 때 머리도 식힐 겸 겸사겸사 해서 떠났던 도로 여행이 그토록 남달랐던 체험이고 베스트 힐링 타임이였다. 제이가 여행지를 검색하고 코스를 정하고 운전과 주숙 잡는 일까지 맡아줘서 나는 논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2주간 케언즈-다윈-울룰루까지 갔다가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시작했다.

퀸스랜드주의 케언즈 서북쪽에 있는 열대우림가운데 쿠란다 마을이 있는데 열대 자연 공원에 세계에서 가장 긴 스카이 레일과 관광열차가 지나가는 열대우림공원에서 수륙양용차를 타고 숲속으로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나무와 새들, 동물들을 구경하고 원주민 공연, 동물원 구경, 나비 박물관을 포함한 열대우림 투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케언즈 마리바에서의 열기구 투어는 호주에서 가장 큰 열기구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수 있는데 새벽에 출발해서 1시간 동안 열기구에서 아름다운 새벽 풍경부터 해가 떠서 까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열린 공간애서 평원지대인 마리바 경치를 마음껏 내려다 보고 착륙후 커다란 가방에 집어 넣는 “열기구 포장” 체험과 시원한 샴페인 한잔으로 마무리 하는 것인데 둥둥 떠있는 열기구와 함께 나의 마음도 두둥실 떠있었다. 

다윈은 NT(노던 준주)의 수도인데 습하고 덥기로 유명하지만 관광 명소도 특별했다. 카카두 국립공원에서의 원주민 암벽화 예술 감상과 수로 및 야생 동물 감상을 하던 옐로우 워터 크루즈는 생태화경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긱 할수 있는 선경과도 같은 경치를 자랑했고 특히 해질 녘 나뭇잎에 비낀 황금 빛갈로 인해 하늘, 나무와 수면이 붉은 잉크를 발라놓은듯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듯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호주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 앨리스 스프링스을 지나서  “호주의 심장”으로 불리는 울룰루에 도착했다. 울룰루는 높이 348m, 넓이 2km, 둘레 9.4km로 세상에서 가장 큰 바위인데 원주민이 지은 이름으로서 일본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배경이 되기도 했다. 원주민들의 성지로 불릴 만큼 경이로운 울룰루는 세계각곳의 관광객들이 몰려오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웅위함과 가슴에서 충격을 느끼게 되였다. 해가 뜨면서 부터 질 때 까지 시간에 따라 , 바람에 움직이는 구름에 따라 변하는 마치 다른 세상의 빛갈이 원주민 조상의 숨결과 영혼이 깃들어 있는것 마냥 신비롭고 신성한 기묘함이 감돌았다. 울룰루의 해돋이 구경 역시 지는 해의 반대면에서 점점 붉어지는 거대한 암석이 해가 산으로 넘어 갈 무렵 붉음의 최대치에 도달했다가 서서히 갈색으로 변하면서 어둠과 함께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볼수 있다. 저녁에 향한 코스는 “빛의 정원” 이 였는데 영국 예술가 부루스 몬로가 창작한 대형 설치 작품인데 5만 여개의 전등으로 만든 밤의 정원이였다. 밤하늘에서 뭇별들이 빛나고 고요한 사막에는 오색령롱한 전등들이 빛나면서 그속에서 불빛을 따라 거닐고 있는 우리는 암흑속에 뭇혀 몽롱하면서 현란한 비현실적인 적막감을 느끼면서 번화한 도시와 분주한 일상을 멀리 한채 오직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리치 필드 국립 공원과 배리스프링스 자연 공원에는 몇개의 폭포와 샘물으로 이루어진 천연 수영장에서 더위를 가시면서 밑바닥이 보이는 샘물에서 물고기들을 감상하며 그들과 함께 헤엄치고 폭포의 물줄기가 쉬지않고 해주는 시원한 등마싸지를 받늗다. 다윈의 해변가 저녁 시장은 매주 2회 열리는데 중국의 저녁 시장 한거리를 연상케 했는데 줄을 서서 사먹는 이탈리아 피자나 동양인들이 파는 꼬치구이, 생과일 쥬스 점포들과 수공품 상인들이 모여서 사람들이 붐비면서 시끌벅적했다. 해변가에 앉아 노을을 감상하면서 먹던 따끈따끈한 음식은 맛있고 밤에 열리는 불쇼 장끼자랑과 콘서트를 감상했다.

2주간 여행기간 눈이 밝아지게 푸른 바닷가와 영혼이 세척당할것같이 시원한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들렀던 곳 마다 자기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고 눈부신 태양아래 잔잔한 물결이 옷깃을 스치면서 피로를 가셔줬다. 그뒤로 4만자 가까이에 달한 석사논문을 마감한 나는 무사히 온라인 졸업답변을 마치고 석사를 졸업하게 되였다. 케언즈 미술관에서 자료수집을 위해 촬영금지 때문에 1시간 동안 서서 부지런히 메모지에 기록했었던 일, 앨리스 스프링즈 주방에서 새벽 1시 까지 어깨에 이불을 걸치고 눈문 쓰던 일, 울룰루 바위주변에서 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의자에 앉아 몰려드는 파리떼를 무릅쓰고 노트북을 들고 논문 썼던 일, 울룰루 캠핑장에서 시간나면 논문을 수정하던일…… 보람차고 알차게 보낸 그때를 생각하면 몰려오는 행복감에 다시 한번 살아있다는것에 감사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였다.

6.코로나 피해서 서부로 이동

농장에 돌아가 6개월간 더 있다가 호주 서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변경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서부로 향하게 되였다. 서부에 도로 여행으로 북으로 부터 남으로 내려오면서 브룸-80마일 해안-카리지니 국립공원-산호만-엑스마우스-코바브로홀-망키미아-칼바리 국립공원-핫 래곤 핑크 호수-피너클스 사막-퍼스-바샐톤-마그리트강-알바니-웨이브록-럭키베이 까지의 여행으로 서부에서 반년 넘어 있던 제이가 자기가 다녀온 코스중에서 알짜배기만 골라서 나를 데리고 다닌 덕에 고맙기만 하다. 

그중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카리지니 국립공원에서 9km 보행인데, 여직 이렇게 긴 등산 코스는 도전해본적이 없어 나한테는 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물 5병을 마시면서 땀을 흘리면서 간신히 걷다가 옆에서 몰래 웃는 제이가 얄밉고 원망 되기도 했지만 끝까지 견지한 일이 마치 역경을 박차고 나온 마냥 스스로 자랑스럽고 장하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코바브로홀에서 보았던 키 넘어가는 거세찬 파도를 보면서 자연의 힘의 거대함과 인간의 왜소함을 절실이 느꼈고 펭귄섬으로 가는 도중 배를 따라 헤염치던 돌고래들과 누워서 휴식하던 바다사자무리, 자대를 들고 크기가 부합되는 꽃게 잡이 하다가 검사를 나온 동물보호기구 인원 만났던 일, 로트네스트 섬에서 자전거 타고 섬을 돌면서 보았던 아름다운 경치와 나뭇잎줄기만 먹던 쿼카(미니 캥거루), 펭군 아일랜드에서 번식 계절을 맞아 둥지에서 알을 까던 수천마리의 갈매기와 팰리컨들을 보고나니 생태환경 보호가 잘돼 그속에서 살고있는 사람도 이렇게 즐겁고 혜택을 받는 상호공존의 양호한 순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껐다.

7. 이 글을 마감하며

서부에서 제일 큰 도시, 호주에서 손 꼽히는 대도시 퍼스에서 2개월 남짓이 있으면서 처음 퍼스에 와서 먹었던 음식이 마라탕이다. 시드니를 떠나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이라서 그토록 그리웠다. 2년 넘게 못 먹어본 건두부를 입에 넣고 목이 메어왔다. 전에 집에서 할머니가 자주 만들어 줬던 건두부볶음이 생각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간이 안맞다다고 반찬 투정하면서 눈에 안차 하던 “시시한” 건두부가 호주에서는 쉽게 먹지 못하는 귀한 음식이였다. 전에 어른들이 “고향을 떠나면 제일 힘든것이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거더라.” 라고 얘기하셨는데 호주에 와서 제대로 실감나는것 같았다. 자기 민족의 뿌리는 못 속인다고 호주에 와서 자주 찾는 음식은 고향 음식이고 우리 민족의 글로 된 위쳇 계정과 우리의 민족의 언어로 된 유튜브 영상, 인터넷 정보를 하루도 빠짐 없이 보고 있다. 

물론 호주에서 모든것이 다 순리 롭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좋았던것은 아니였다. 퍼스에 있는 치킨 공장에서 일하다가 중국 조선족이라는것을 눈치 채고 색안경을 걸고 나를 대하던 한국 사람이 같은 부문의 책임자 여서 스트레스 땜에 한달만에 그만둔 적이 있었고 전에 농장에 있을 때는 느낀적이 없던 가끔 받게되는 중국 사람에 대한 편견적인 눈빛이나 태도가 신경쓰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 와서 경험한데 의하면 자본주의든지 사회주의든지, 발달한 나라든짚발전도상 나라든지, 외국사람이든지 중국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곳은 어디나 다 똑같고 어디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으며 매사에는 두개 면이 존재 하니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으로 객관적인 마음가짐으로 삶을 보아야 한다는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지금 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지내면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기 티켓이 저렴해지고 코로나가 잠잠해 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나는 호주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얼마동안 더 있을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동안 걱정보다는 희망으로, 불평보다는 만족으로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인생에 필요한 경험과 좋은 추억들을 쌓고 있는중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나는 조선족으로서 언제나 자호감을 느끼고 우리 말과 글을 잘 배워 세가지 언어를 장악하고 있는데에 더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우리 민족의 습관과 문화를 사랑하고 언제 어디에 있든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고 부지런히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시에서 빠른 생활 절주와 일, 혹은 대인관계로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숨 막히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나처럼 어느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서 힐링하고 싶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분들이 나의 이 글을 읽고 적게 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적어보았다. 

2022년 임인년 호랑이 해 , 새해에도 여러분 모두 활기찬 한해가 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화이팅!!!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 사장
17.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8.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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