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15] 한국에서의 직장생활 수기 by 리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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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윤련순, 음악편집 / 변소화

한국에서의 직장생활 수기

글 / 리해월

2018년 여름, 나는 두 아이를 친정 어머니한테 맡겨놓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여 나는 지인의 소개로 한 부품회사에 취직하게 되였다. 규모는 작아도 30여년 된 회사라 바우처가 만여개나 되는 탄탄한 회사였다. 

우리 회사는 직원이 100여명 되는 초정밀 에칭제품제조 전문회사이다. 자동차 부품으로는 모든 차종 이물질 제거용 ‘엔진오일필터’를 제작하고 스마트폰 부품으로는 각종 모바일 기종에 적용된 ‘카메라모듈’, ‘스피커'(방열판) 등을 에칭 후 도금하여 제작하며 방산제품으로는 량면 에칭 및 다단형 에칭을 적용하여 탱크, 잠수함 등의 연료전지 내 ‘엔진오일 순환 패턴’을 제작하였다. 또 반도체 부품으로는 세미커넥터용으로 ‘LED 단자’를 제작하고 의료기기 부품에서는 레이저 치료를 받기 어렵거나 피부 손상 위험성이 낮은 관리법을 찾는 고객들에게 대안 책으로 만들어진 ‘피부 치료용 니들’을 제작하거나 그 외 정밀부품도 제작이 가능하며 명판·책갈피·엘리베이터버튼도 제작하였으며 이 외에 기계나 장치류에 대하여 그 제조자, 형식, 용량 그 밖에 중요한 제원을 기록하며 다양한 형태로 제작이 가능한 부품도 있었다. 생활용품 및 모형으로는 초정밀 가공으로 강력한 수압상승 효과를 실현할 수 있는 ‘샤워기’ 정밀함을 요구하는 ‘모형제작 분야’에 에칭기법을 통한 부재를 제작할 뿐만 아니라 실크인쇄에서는 등사판과 유사한 일종의 공판 인쇄법으로 결이 거친 견포에 인쇄용 도료의 여과를 차단하도록 한 문자나 그림의 형을 만들고 이 천을 간단한 틀에 바른 것을 고무 롤러를 사용하여 인쇄하는 회사였다. 또 내가 알고 있는 금속 박판 처리 장치, 다단형 기판 제조 방법, 피부 치료용 니들 제조방법 등 3개의 특허증도 있다.

내가 회사에 출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회사 직원 대부분이 한국인일줄 알았다. 다른 나라에서 온 직원들이 몇십명이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출근한 지 며칠이 안 되여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였다. 우리 회사 전체 직원 중 외국인이 반을 넘는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것도 7개 나라의 직원들로 이루어진 글로벌 회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회사 전체 직원 중 중국인이 1위로 제일 많았고 한국인이 2위, 그 다음으로 3위를 차지하는 나라는 월남(한국에서는 베트남이라고 부름)이였다. 그리고 로씨야어를 사용하는 로씨야인과 우즈베끼스딴인, 까자흐스딴인 즉 고려인이 5~6명이였으며 캄보디아, 스리랑카, 등 나라에서 온 직원도 몇명 있었다. 세계 각 나라에서 온 우리 회사의 외국인 직원들은 모두 한국어로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한국어가 능숙했다. 조선족 학교를 졸업한 우리 조선족 동포들한테는 한국어가 모어처럼 익숙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직원들은 한국어를 배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어를 제법 잘한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사장님은 매년 가을에는 야유회를 조직하였다. 내가 입사한 그 해 가을에도 회사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안산에서 가까운 수리산으로 야유회를 갔다.

큰 뻐스 한대와 작은 뻐스 두대가 아침 8시 30분에 안산역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수리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뻐스에서 내린 후 주자창 부근에서 먼저 집체사진을 찍고 다음 사장님께서 하루 일정에 대해 설명을 하셨다. 먼저 등산을 하고 다음 산 아래에 위치해 있는 산장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그 다음 축구와 피구게임을 하기로 되여 있었다. 우리는 산을 오르기 전 김이 몰몰 나는 시루떡이랑 귤 5알, 그리고 생수를 나누어 받았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온 직원들을 챙기시는 사장님의 배려였다. 우리는 따뜻한 시루떡을 먹고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 가지 등산 코스가 있었는데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산은 생각보다 많이 가파롭다. 겨우 정상에 올라서 사진을 찍고 간단히 간식도 챙겨 먹고는 휴식을 취했다. 바람도 좀 불고 날씨도 좀 추웠지만 내려올 때에는 땀까지 흘렸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땅이랑 나무잎이 약간 젖어 있었고 길이 너무 미끌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가 일수였다. 왕복 두 시간 만에 산 아래에 위치한 산장이 눈앞에 보였다. 사장님께서 먼저 산 아래에 도착하셔서 뒤에 오는 직원들을 기다리신다. “운동신경이 좋은데요. 나는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면서 우리 팀을 칭찬하신다. 그러고 보니 우리 팀보다 먼저 도착한 팀은 없었다. 꼴찌가 싫어서 부지런히 산을 내려온 건데 아직 도착한 팀이 없었다. 산 아래에는 큰 강이 있었는데 물이 엄청 맑았고 큰 물고기도 있었으며 주위의 풍경도 멋있었다. 또 운동장도 넓어서 운동하기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노래방도 있어서 야유회를 하기 딱 좋은 곳이였다. 이 날은 우리 외에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 풍경 사진을 찍기 좋아하는 나는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다. 점심메뉴는 삼계탕이랑 오리로스 두가지였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후에는 피구랑 축구게임도 있었다. 배구는 알아도 피구는 처음 들어본다. 두 팀으로 나누어 배구공으로 다른 팀의 어느 한 사람을 맞히면 맞은 사람은 게임에서 나가게 되고 마지막까지 남은 한 팀이 우승하는 게임이였다. 우승하는 팀한테는 현금 10만이라는 상금도 있었다. 게임 후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 좋아하는 직원들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놀기도 하였다. 한국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회사직원들과 야유회에도 다녀오고 하루를 뜻 깊게 보냈다.

나는 “크린룸”이라는 생산부문에서 일하게 되였다. 우리 부서에는 3개의 나라에서 온 직원이 있었는데 각각 우즈베끼스딴, 월남(한국에서는 월남을 베트남이라 부름), 그리고 중국에서 온 조선족 동포였다. 우리 부서 직원 10명 중 녀자 직원은 59세 되는 중국인 주임이랑 50세 되는 중국인 반장님 그리고 나였다. 이 두 분 외에 우리 부서의 직원 관리자는 따로 있었다. 47세 되는 성씨가 남씨인 중국인 반장님이 계셨는데 남반장님은 출근해서는 하루 작업일지에 맞춰 매 직원들한테 일을 안배해준다. 다른 분들은 입사한지 3년도 훨씬 넘었고 또 내 나이가 제일 어리다 보니 우리 부서에서는 내가 막내였다.

우리 회사에서는 호칭 방면에서 나이가 이상이든 이하이든 나이랑 상관없이 “언니”, “형”, ”오빠”, “누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분명 나이가 이하인데 “언니”, “형”, ”오빠”, “누나”란 호칭을 들으면 거북한 감을 느끼는 이가 많다. 본인보다 나이가 이하이면 그냥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 역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내가 막내다 보니 남자직원들한테 오빠라 부르는 건 문제 없었지만 오빠라는 호칭이 입이 안 떨어지는 분들한테는 이름 뒤에 “씨”를 붙여서 불렀다. 녀자 직원들끼리는 나이가 이상이든 이하이든 거의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는 녀자 직원들 그 누구한테도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는 싫었다. 우리 부서 남자직원들은 주임님이랑 녀반장님한테는 “누나”라고 부른다. 극 소수의 직원들 외 거의 모든 직원들이 주임님과 녀반장님을 “누나”, “언니”라 불렀지만 나는 항상 “주임님”, “반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 누구도 남반장님을 “형”, “오빠”라 부르지 않고 “반장님”이란 호칭만을 사용했다.

또 나는 우리 부서에 있는 우즈베끼스딴 직원과 2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부추를 “염지”라 불렀는데 고려인들도 “염지”라 부른다고 했다. 그 외에도 우리가 평상시에 부르는 채소 이름도 같은 것이 많았다. 우리 조선족은 오래 전부터 국수를 “국시”라 불렀다. 나는 발음이 변형된 사투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류량하는 삶을 상징하는 고려인의 음식이 바로 ‘국시’였던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안산에 로씨야와 우즈베끼스딴에서 온 고려인이 대부분이였는데 고려인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현재의 로씨야 및 구쏘련 지역으로 이주한 이와 그 친족이였다. 한국 정부에서 2010년 11월에는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 이 제정되였다. 그리하여 로씨야나 우즈베끼스딴, 그리고 까자흐스딴에서 온 고려인이 한국에서 좋은 우대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리유를 알게 되였다. 또 고려인은 주로 고려인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아 생김새는 한국인과 흡사하지만 2세부터는 거의 한국말을 리해하거나 구사하지 못한다. 특히 고려인 3~5세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있어도 로씨야의 사고방식과 문화에 동화되여 있다. 하지만 담근김치, 국시(잔치국수) 등 한식과 류사한 음식과 돌잡이 문화나 설날, 추석과 같은 우리의 명절 문화도 남아있다.

외국어를 자주 사용하는 한국에서는 월남을 베트남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은 북쪽이 중국과 접하여 있는 작은 나라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 회사 다니는 베트남 직원들은 우리 민족이랑 생김새가 거의 흡사하다. 우리 부서에 있는 몇 몇 베트남 직원들은 한국어가 능숙하지만 그래도 어휘를 제대로 사용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우리 부서에서는 매일 순번으로 퇴근 전에는 쓰레기를 버리게 되여 있다. 즉 “쓰레기당번”이 있다. 가끔 남반장님, 주임님, 녀반장님이 “오늘 누구 쓰레기당번이야?” 라고 묻는 질문에 베트남 직원들은 “나, 쓰레기야.”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웃음 바다로 변해버린다. 몇 년 동안의 동고동락 속에서 우즈베키스탄 직원과 베트남직원들은 우리말이 부쩍 늘었다. 가끔 롱담으로 “오늘 누구 쓰레기야?” 하고 물으면 “나, 오늘 쓰레기 버려~”가 아니면 “xx의 쓰레기 나 버려요.”라고 한다.

작년 겨울엔 회사에서 새로 입사한 직원들한테 겨울잠바를 한 벌씩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우리 부서에 있는 베트남 직원 한 명이 잠바를 갖고 왔다. 신입 아닌데 잠바를 갖고 오니까 우리 동포 직원들이 물었다. “너 왜 잠바 가져 왔어? 신입만 줄 건데…”라고 하자 그 베트남 직원이 “’여덜’년이 1개 가졌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우리 동포 직원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말이지?”라고 되묻는다. “’여덜’ 년이 뭐에요?”라고 내가 재차 물었다. “나 올해 ‘여덜’ 년이 됐어요. 이거 다 낡았어. 그래서 한벌 더 가졌어.”라고 한다. 그 말에 다들 그제야 원인을 알고 “아~”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베트남 직원들은 “일년”, “이년”, “삼년”, “사년”, “오년”… 이렇게 부르지 않고 “한 년”, “두 년”, “세 년”, “네 년”, “다섯 년”…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입사 한지 8년 되면 한 벌씩 더 나누어주고 있었다. 겨울잠바 한 벌을 8년씩이나 입다 보니 낡아서 새것으로 교체할 때가 되였던 것이다. 시간이 참 빨리도 흘렀다. 이 회사 다닌 지 몇년이 안된 거 같은데 벌써 8년이라니. 저마다 “나는 20년이 되는구나.”, “입사한지 엊그제 같은데 난 벌써 10년이 되는구나.”, “나는 올해 8년이 되는구나.”라며 이 회사에 와서부터 지나간 무정한 세월을 한탄하신다. 한 것도 없는데 세월은 채찍질하면서 잘도 달렸다.

주임님은 2000년도에 한국에 “간병인”으로 오셨다고 한다. “한국바람”이 시작한 초기였다. 집조를 맡기고 비싼 리자 돈을 주며 6만이나 되는 뭉치 돈을 빌렸다고 한다. 그때 생각하면 리자 돈은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 오르는데 하루하루를 속이 재가 되여 수속이 나오기만을 몇 개월이나 기다리셨단다. 그 동안 속을 얼마나 태웠는지 체중이 몇킬로그람이나 빠졌는지 모른다고 하신다. 수속이 안 나와서 한국으로 못 나가게 된다면 그 많은 리자 돈은 어떻게 갚을지 막막하기만 할 따름이다. 금방 한국에 나왔을 때 월급도 낮아서 몇 년 동안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아글타글 벌어서 빚을 갚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그때 몸이 망가질 때로 망가지셨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위병이 나서 약을 1년 365일을 달고 살게 된 거 같다고 하신다. 한국에서 20년을 살면서 젊음을 오로지 한 직장에 다 바쳤다. 얼마 전에는 현금을 주고 좋은 곳에 위치 해 있는 한국 돈으로 3억이나 되는 아파트를 사서는 새로 장식까지 했다. 이제 1~2년만 있으면 한국에서 몇십만원이나 되는 국민연금도 탈 수 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이 일을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가? 내가 이 회사에서 20년을 일하면 3억은 모을 수 있을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많고도 많은데 내 꿈을 언제 이룰 수 있을가? 나는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한국에서는 중국동포들한테 2011년부터 c38 방문취업 비자로 한국에 와서 바로 H2비자로 변경 후 한국에서 취직 가능한 비자를 주었다. 녀반장님은 2011년에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바람”을 타고 한국에 오셨다. 우리 회사에 온지도 벌써 8년이 된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친 남동생이 맡은 원룸 방에서 함께 지내셨다고 한다. 아무리 친 남매라고 해도 좁은 원룸이라 너무 불편해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어서 빨리 나만의 방을 맡아서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두 달 후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작은 원룸 방을 얻어서 혼자 지내셨는데 숨이 확 트였다고 한다. TV도 없고 스마트폰도 나오기 전이라 와이파이도 없어서 퇴근해서 집에 가면 오락 같은 건 볼 수도 없었다. 해빛도 들어 오지 않는 작은 방이였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 숨을 쉴 수 있었고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어서 마음만은 편했다고 한다.

2011년 3월부터 우리 친구들도 이 비자로 한국에 한명, 두명 나오게 되였다. 그렇게 연길에 있던 친구들은 다 “한국바람”을 타고 한국으로 왔던 것이다. 나도 그 “바람”을 타고 한국으로 올려고 5월에 수속을 넣었다. 그때 당시 비행기표 가격도 엄청 쌌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려행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에 비자를 넣었는데 몇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몇달 후 나온 비자를 나는 결국 포기했다. 마침 나는 연길에서 내 꿈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면서 려행은 뒤로 미루기로 했었다.

한번은 내가 남반장님한테 한국에 오시게 된 계기와 금방 한국에 오셨을 때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남반장님한테는 친 누나가 있는데 한국인이랑 결혼을 해서 한국 부산에서 살고 계신다고 하셨다. 2003년도에 친척방문이라는 비자로 한국에 나오셨단다. 한국정부에서 이 정책이 금방 나왔을 때였는데 마침 나이가 딱 되여서 한국으로 오시게 되였다. 부산에 있는 누나네 집에 있으면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남반장님한테 맡는 일을 찾기 힘들었다. 3개월이 지나서 지인의 소개로 천안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였다. 하지만 그 회사 사장은 월급을 한두 달 미루더니 몇 개월 치 월급을 떼여 먹고 도망을 갔다. 하루 아침에 회사는 다른 사람 명의로 변경되고 사장은 사라지고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을 당했다. 인생이 씁쓸하고 의지할 곳 조차 없었다.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온갖 고생 다 했다. 몇 달 동안 안 먹고 안 입고 밤낮없이 아글타글 애써 힘들게 일을 했지만 월급 1전 한푼 받지도 못하고 가족들한테 알릴 면목도 없었다. 천안은 남반장님한테 있어서 안 좋은 기억으로 남는 곳이였다. 낯선 타국에서 살아갈 용기조차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무작정 안산으로 떠났다. 낡고 자그마한 원룸 방 하나를 얻어서 이부자리랑 간단한 살림살이를 사놓고 일자리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돈은 벌어야 했으니 노가다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노가다 일은 돈은 많이 벌 수 있었지만 일이 너무 힘들었다. 고된 로동력이 필요했는데 남반장님의 마른 몸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3년 동안 노가다 일 하시면서 몸이 엄청 허약해졌다. 어느 하루, 그날도 안정된 일자리를 찾으러 나갔다가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안산역 지하보도를 지나다가 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한 장을 받았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은 아무 생각도 없이 누워만 계셨다고 하신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다가 전단지가 손에 잡혔고 전단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그 전단지는 교회 전단지였는데 “예수님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당신을 행복의 길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남반장님은 행복하게 살고 싶었단다. 전단지에 적힌 기독교회 전화번호에 전화를 해서 상세한 위치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통화가 끝나고 남반장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그런데 더부룩한 수염에 며칠 동안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지 않은 탓으로 얼굴은 여위여서 볼 품이 없었다. 노숙자를 방불케 했다. 반장님은 수염을 깎고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전단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셨다. 기독교회에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식사도 하고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를 드림으로써 세상에 다시 태여난 기분이였다고 한다. 아, 사람 사는 맛이 나는구나.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걸 느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끼고 다 함께 즐겁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용기를 갖게 되였다. 며칠 후 가방을 메고 로동부에 일자리를 찾으러 가셨다. 거기서 우리 회사 강차장님이 “혹시 일자리를 찾으십니까? “하고 물었단다. 남반장님이 “네, 일자리를 찾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마침 저의 회사에서 직원을 모집하고 있는데 지금 저의 회사에 가보시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럼 지금 가서 봅시다.” 이렇게 대답하고는 강차장님이랑 우리 회사에 오시게 되였단다. 남반장님은 우리 회사에 오자마자 메고 온 가방을 벗어놓고 일부터 하셨단다. 열심히 일도 잘하신 덕분에 몇 년 후 회사에서는 반장이라는 직급까지 주었고 회사 직원들은 모두 “반장님”하고 믿고 따랐다.

한번은 일손이 딸려 남반장님까지 나섰다. 내가 기계 온도랑 속도를 설정해 놓고 남반장님한테 기계를 돌리도록 했다. 남반장님께서 한창 열심히 기계를 돌리는데 주임님하고 녀반장님이 설정된 속도를 보시고는 한마디씩 하신다. “아니, 그걸 0.4m/min로 돌리고 있으면 어떡해요?”, “지금까지 0.4m/min으로 돌렸던 거에요?” “나 못 살아.”라고 녀반장님이 얘기하자 남반장님이 “난 얘가 이렇게 설정해 주니까 이렇게 하는 줄 알았지.”라고 하신다. 그 말에 주임님이랑 녀반장님이 또 한마디씩 하신다. “몇 년 했는데 지금까지 그것도 몰랐나요?” “하기 전에 잘 확인 했어야지. 좀 더 빨리 돌려요.”라고 쏘아붙인다. 누가 반장님인지 헛갈리는 분위기다. 마음이 착한 남반장님은 “그럼 몇으로 하게요?”라고 되묻는다. 주인님과 녀반장님은 이구동성으로  “당연히 0.6m/min으로 돌려야지.”라고 하신다. 한참 후에 주임님이랑 녀반장님이 또 한마디씩 하신다. “하기 전에 잘 확인하고 해요.” 남반장님은 나 때문에 순간에 동네북이 되셨다. 그러자 남반장님께서 한마디 하신다. “내가 뭐 동네감초인가?”라고 하셨다. 그 말에 우리는 빵하고 터졌다. 얼마나 웃겼는지 나와 주임님은 배를 끌어안고 웃으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주임님과 녀반장님은 또 “’동네감초’는 또 뭐에요? 어디서 온 감초에요? ” “무슨 단어 쓸려면 좀 똑바로 써요.” ”동네북이면 북이지, ‘감초’는 어디서 왔대?”라며 바로 잡아주신다. 나는 눈 화장이 번질 가봐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느라 뿜어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한마디를 했다. “반장님, 저 때문에 ‘동네감초’ 되셨네요.” 그러자 남반장님께서는 “네가 웃으라고 한말이다.”라고 버젓이 말씀하신다. 이 말이 끝나게 바쁘게 우리 “3녀사”는 또 빵하고 터졌다. “3녀사”라는 호칭은 남반장님이 붙여준 것이였다.

또 어느 날 있은 일이다. 한 직원이 완성된 제품을 옮기자 제품 뒤에 있던 간지가 보인다. 간지가 보이자마자 녀반장님께서 저 멀리에 가서 그 간지를 보관장소가 있는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였다. 그 모습을 보시고 남반장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간지가 나오면 오금을 못 보는 구만.” 그 말에 웃음 바다로 되였다. 우리 “3녀사”는 얼마나 웃었는지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녀반장님이랑 주임님은 “오금을 못 본대. 하하하~~~” “오금을 못 쓰다지.”라고 한마디씩 하신다. 남반장님께서 “오금을 못 보다가 맞는 거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다. “무엇을 오금이라고 하는지는 알아요?”라고 주임님이 되묻는 말에 남반장님께서는 “난 그냥 전에 들었던 거 써 먹었을 뿐인데요.”라고 하신다.

내가 금방 회사에 왔을 때만 해도 남반장님은 한국 분인 줄 알았다. 한국어가 아주 능통하셨으니까. 한번은 내가 너무 궁금하여 “한국어는 능숙한데 왜 우리말 성구속담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나요?”라고 물었다. 어릴 때부터 한족학교를 다니셨단다. 친구들도 거의 다 한족이다 보니 우리말 성구속담뿐만 아니라 관용구랑 평상시에 잘 쓰지 않는 어휘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 리가 없다.

또 한번은 남반장님은 뉴스에서 본 얘기를 하시면서 “뛰는 사람 우에 나는 사람 있다더니 재주가 있지.”라고 하신다. 남반장님 얘기가 끝나기도 바쁘게 주임님이랑 녀반장님께서 “’뛰는 놈 우에 나는 놈’에요.”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써 먹을려거든 좀 제대로 써요.” “사람이 아니라 왜 놈이요?” “당연히 사람이 아니라 놈이지.”라고 몇마디씩 하시면서 웃으신다. 나도 웃겨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내가 이 부서에 막내로 들어와서 함께 일을 하면서 지낸 지 벌써 3년이 된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성구속담, 관용구 이 외에 자주 쓰지 않는 어려운 어휘들도 지금은 남반장님이 아는 것이 많다.

남반장님은 우리 직원들한테 자전거를 타면 운동도 되고 건강에 좋다고 하시면서 건강을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라는 것이다. 나한테도 몇번씩이나 자전거를 사라고 부추기셨다. 우리 회사에 남반장님이랑 동갑인 몇 명 직원들이 있다. 그 분들은 남반장님을 이름 대신 가끔 롱담으로 “남집사”라고 부른다. 좋은 자가용차는 집주차장에 고의 세워두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성경 말씀을 듣는다.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나 집에서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성경 말씀을 듣기도 하며 일할 때에는 높은 소리로 찬송가까지 우렁차게 부르신다. 남반장님이 얼마나 우렁차게 불렀으면 우리 부서랑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접견실에서 남반장님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기독교회에 몸 담근 지도 십 년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기독교회를 열심히 다니셨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면서 교회에 가는 날은 적지만 그래도 꾸준히 온라인 예배로 마인드 강의도 열심히 시청하신다. 남반장님은 파트너 타임으로 일하는 팀에서 화장실에 갈 때거나 바쁠 때에는 본인이 하던 일을 놔두고 교대해서 도와주신다. 뿐만 아니라 무거운 물건을 드는 일에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나이 50세가 되면서 현재 유착성 관절낭염으로 어깨를 들고 돌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착성 관절낭염이란 특별한 원인 없이 통증이 수반된 수동 및 능동 운동 장애를 가져오는 질환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통증으로 당분간 자전거도 탈 수 없게 되였고 전신마취 하에 어깨 시술도 받으시고 한 주일에 두 번씩 물리치료도 받으러 다니신다. 유착성 관절낭염은 금방 치료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은 무거운 것도 들지 말아야 한다. 남반장님은 외향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력 넘치며 타인과의 대화를 즐기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엄도 있고 리더로서 직원들한테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셨다. 남반장님이 년차로 휴식한다고 하면 난 서운한 감이 들었다. 왠지 남반장님께서 안 계시면 적막함이 몰려오고 어떻게 12시간을 보낼 지 아득하기만 했다. 3년 동안 남반장님 덕분에 하루하루 즐거웠고 웃음이 끊기는 날이 없었다.

한국에서 일은 비록 힘들었지만 직장 동료들과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속에서 나는 그나마 행복하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세계 여러 민족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회사직원들과의 소중한 인연으로 나의 삶은 더욱 다채롭다. 앞으로 나의 삶은 더욱 빛나길 바라고 나의 동료 그리고 친구들 지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바이다.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크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8.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19.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0.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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