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28] 아부이야 by 최화숙

낭독으로 들어보세요

본 문장을 낭독으로 만나보세요. 아래 재생버튼을 클릭하여 들어보세요.

낭독 / 장련, 음악편집 / 변소화

아부이야

글 / 최화숙

아버지. 아버지가 어린 내 손을 잡고 거닐던 이 거리를 나는 내 키를 훨신 초월한 막내딸의 손을 잡고 걷고 있습니다. 자식이 무엇인지요. 남의 가정집 일을 두 집이나 다니는 저에게 간만에 주어진 황금같은 일요일. 몸이 천근 같지만 지속되는 코로나로 날개 부러진 새처럼 방콕에 지쳐있는 딸이 안스러워 방역해체가 되기 바쁘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나는 아버지의 체취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딸의 손을 잡고 밀착한 몸과 몸의 전율을 감촉 할 때면 행복 바이러스가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이 묘한 감정이 바로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싶은 부모사랑이겠지요. 제가 딸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의 잔잔한 여울소리가 들리듯이 아버지도 저에게 태산같은 부성을 몰부으셨겠지요. 차편이 어려운 시골에서도 여름 방학이면 나를 데리고 할빈에 와서 이 중앙대가돌길을 자박자박 밟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길거리 음식도 먹고, 송화강에서 배를 타고 태양도에도 가고, 이곳의 구석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메아리로 들려옵니다.

아버지는 코로나라는 단어가 생소하시지요? 그 악성 바이러스는 전파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혹시라도 감염의 의구심땜에 사람들 사이에 실낱같은 거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도 어디를 가도 건강코드를 스킨해서 바치고 일상생활이 여러모로 참 어렵고 불편합니다. 아버지. 겁이 유별나게 많은 나는 꽉 막힌 버스를 타기보다 차라리 걸어다니는 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삼각형을 그리기라도 하듯 우리 집에서 사장님네 집으로, 사장님네 집에서 또 다른 사장님 집으로 걸어 다니면서 계절따라 변해가는 가로수와 호흡도 나누고, 오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소리에 귀도 기울이고, 아버지와 대화도 주고 받고, 교통비도 축적하고. 이것이야말로 일거량덕이 아니겠습니까? 난 요즘에 부쩍 내게 이 튼실한 두다리를 주신 아버지가 눈물나게 고맙습니다.

내가 여섯 살 때였지요. 아침에 일어서던 내가 썩은 나무 몽뎅이처럼 한쪽에 픽 하고 꼬꾸러지니 아버지는 바로 담요에 나를 싸서 안고 앞집 침쟁이 집으로 달려갔지요. “아이구 숙아, 안된다. 숙아, 니는 이러면 안되구 말고. 니는 꼭 혼자 걸을수 있어야 된다. 알겠나 숙아. 으흐흐…” 아버지 눈이 화등잔처럼 커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대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수 없었지요. 그냥 귀에는 윙윙하는 바람소리와 “에~으 에~으” 하는 어미양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였죠. 침을 아무리 찔러도 나는 아무 감각도 모르고 바지에 오줌만 실실 쌌던거죠. 정성이면 감천이라고 매일 침을 맞히고 아버지가 밤 낮 다리를 주물러줘서 며칠만에 내가 벽을 짚고 갓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비칠비칠 걷기 시작했지요.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고 말고요. 그때 아버지가 바로 손을 쓰지 않았다면 이 웅진 세상에 앉은뱅이가 되여 어찌 살았겠습니까?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게 어디 이 두 다리 뿐이겠습니까? 나도 이젠 외할머니가 되였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외길 인생에서 내 가지들이 이리 저리 뻗어가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아니였으면 나는 습관성 유산으로 평생 애도 못 낳았을 겁니다. 임신하면 두달을 못 넘기고 피떵이를 쏟아버리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는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녔지요. 아버지가 약이라고 양똥같은 걸 하루도 빼지 않고 4달이나 먹이던거 말입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나서야 알았는데 그게 바로 다른 사람이 유산한 피떵이였다면서요. 여자들도 비려서 하기 힘든 피떵이를 뜨거운 물에 주물러 얼거미에 걸러서 솥에 말리워 환을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체면이 유별나게 많은 아버지가 자존심 깔고 산부인과를 찾아 다니며 그 구하기 힘든 걸 4개나 구해서 먹였으니 말입니다.

아버지. 나 지금도 세월을 거슬러 보면 말똥머리 여섯 살 때가 제일 환상적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머니가 노란 기름이 동동 떠있는 양젓을 훌훌 불어서 먹이고, 낮에는 엄마랑 죄기도 만들고, 헌 옷으로 인형도 만들어 애기 놀이도 하고, 아버지 다리위에서 눈을 맞추며 “우리 숙이 쓩 올라간다. 윙~ 윙, 우리 숙이 비행기 타고 아버지랑 달 나라 별 나라 구경 간다” 하며는 세상이 다 내 것인 것처럼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깔깔댔지요.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아버지가 내 다리를 주무르며 구수하게 들려주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얘기를 듣다가 사르륵 잠이 들 때 말입니다. 내가 백설공주가 되어 어머니 아버지 손을 잡고 동화속의 아름다운 세상을 돌고 있는거예요. 그 유리알 같던 행복이 외가집에 가면서 산산조각이 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작은 내 가슴으로 감당하기 너무 아팠던 그 해 봄. 우리 조무래기들이 참새처럼 재잘대며 강뚝에서 쑥을 캐고 있을 때 였지요. 한창 가레질을 하던 아줌마가 갑짜기 뛰여와 내 손을 덥썩 잡더니 “아이고 니 경순이 딸 맞지. 금방 주어 왔을 때는 온 몸이 재투성이 천지라 마치 쥐새끼 같았다. 구경 온 사람들이 살지도 못한다고 변소에다 내다 버리라고 야단법석이였지. 남들이야 뭐라고 하던 경순이하고 태진이가 아를 꼭 안고 울어샀더니만. 아이고 저 쌍고풀에 판들거리는 눈알 좀 봐라. 보조게도 쏙 드가는게 제법 이쁘다. 경순이가 아를 못나서 그렇지 학교때부터 야무지기로 경순이 따라갈 사람 없고 말고. 가시나 니는 복 받은거다. 니 엄마 아버지 못 만났으면 벌써 까마귀 밥이 됬을거다. 장차 커거들랑 엄마 아버지께 잘 하거라…” 눈꿉까지 찍으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손에 쥐여주는 그 아줌마가 갑짜기 마귀로 보이며 하늘이 핑 돌고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눈을 뜰수 없었지요. 내가 깨여났을 때는 외가집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누운채 이마에는 수건이 얹어져 있더군요. “와이구 이것아 이제야 살아났구나, 니가 없으면 니 엄마 어찌 살겠나. 내가 그 여자 가만두면 성을 간다. 니 엄마랑 어려서부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더니 어디 애한데 할 말이 따로 있지 으흐흑…”하며 나를 꼭 껴 안고 넑두리를 하는 것이였지요. 소나기를 두드려 맞은 병아리처럼 너부러져 있던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외할머니를 확 뿌리치고 나 친엄마 찾아 간다고 맨발로 막 뛰쳐나가 마당에 엎어져 악을 쓰고 울었지요. 핏줄이 뭐 자식이라고 그 어린 게 무슨 친 엄마를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듬해 내가 외할머니를 따라 우리 집이라고 왔을 때는 중국사람들이 위, 아래에서 살고 우리 사람들이 중간에서 사는 긴 동네였죠. 그때 내게는 낯선 동네보다 어머니 아버지를 보는 게 더 낯이 설었습니다. 그렇게 보고싶던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도 외할머니 치마자락만 잡고 소 눈알 굴리듯 눈만 멀뚱했지요. 내게 매일 젖을 짜주던 어미 양도, 지 젖을 빼앗아 먹는다고 심통이 나서 나만 보면 총알같이 날아와 뜨박던 새끼양도, 내가 쓰던 파란색 토끼 모자도, 매일 업고 놀던 소캐뭉치 인형도, 보고싶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내가 입학하던 날 어머니는 밤새 지은 해군복 치마저고리에 장미꽃 무늬가 돋힌 천으로 리봉까지 한뜸 한뜸 달아 책가방을 곱게 만드셨지요. 새 옷에 새 책가방을 메고 어머니 아버지 손을 잡고 학교로 가는 길이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시골 학교에서 도시애들처럼 눈에 띄게 차려입은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학교 선생이다 보니 처녀선생도 친구들도 나를 살갑게 맞아주었지요. 나를 빙 둘러 싼 눈들을 피해 나는 자꾸 가재처럼 슬슬 뒷걸음만 쳤지요. 노는 시간에도 친구들이 폴작폴짝 줄뛰기를 뛰고 죄기를 차고 웃고 떠들어도 나랑은 아무 상관 없듯이 대문에 붙어서 꼼짝도 않고 땅만 보고 있었지요. 학교 운동회 날 사람찾기 달리기에서 종이 쪽지를 들고 쭈물대는 나를 보고 안달이 난 어머니가 쫓아와 “숙아 누군데 빨리 소리쳐라 꼴등하겠다. 그 쪽지 한번 펴바라” 하는 재촉에 나는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최~선~생~”하고 기어드는 소리로 되뇌였지요. 그 못난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한번은 내가 난로불을 쬘라고 친구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다가 똘랑쟁이 문호한데 탁 밀리어 한쪽에 자빠졌지요. 마침 지나가던 아버지가 보고 갑짜기 문을 차고 들어오더니 문호를 획 밀치며 “이놈이 어디서 못되게 굴고 있어? 너만 귀한 자식인 줄 알어. 버르장머리 없이 아무나 때리고 밀치고 여기가 너거 집이가. 한번만 우리 숙이한데 함부로 했다간 내게 혼날 줄 알아라. 자식이…”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지요. 그때 아버지 두 눈에 이슬이 맺히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늘 친구들 무리에 못 휩쓸리는 내가 얼마나 속이 아팠으면 선생의 체신도 잊으시고 부성의 위력을 보였겠나 말입니다. 

천진난만해야 했던 내 동심도 내가 닫아버린 철조망에서 시들어 가고 말았죠. 현기증이 자주 오고 속은 자꾸 뭐가 먹고 싶은 갈증을 호소하고 바로 흙이였죠. 어머니가 바닥에 물을 뿌렸다하면 흙이 먹고파서 환장이 났지요. 나는 어머니에게 한대 얻어맞을 망정 손가락에 후벼판 흙은 입에 넣고 씹어야 직성이 풀렸지요. 날이 갈수록 어지럼증이 자주 오고 몇번이나 까무러 치기도 했지요. 이런 내게 어머니 아버지는 방학마다 나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면서 내 기분도 돋구고 시야도 넓혀주려고 애도 참 많이 썼지요. 거부기 피가 원기에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할빈 송화강에서 80살이 넘는 거부기를 사서 생피를 먹이기도 했지요. 해마다 집에서 병아리를 키워 주먹만 하면 밭에 심어놓은 황기 당삼에 찹쌀까지 넣고 곰닭을 질리도록 해 먹이기도 했지요.

심한 정서불안을 앓고 있는 내게 어머니 아버지는 약을 먹일 수 밖에 없었죠. 그 어린것에 신경 안정제를 먹일 때 마다 어머이는 “이 가시나 니가 어쩌자고 이렇게도 어미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 니가 뭐가 부족해서 이르고 있나 말이다. 어이구 내 팔자야…”하며 땅이 꺼지게 넋두리를 하기도 했지요. 수면제를 먹고 의식이 몽롱해지면 언제나 캄캄한 어둠속에서 혼자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내가 보였어요. 늘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라니 간도 콩알만 해 바스락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군 했지요. 이런 내게 아버지는 늘 수호신이였죠. 내가 밤에 변소에 가면 내가 볼일을 다 볼 때 까지 아버지는 전지를 비쳐들고 “으..흠.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나를 지켜주었지요.

베들베들 말라가던 동심에도 사춘기는 오던 가봐요. 처음 생리가 오던 날 아버지는 나에게 “아이고 우리 숙이 언제 이래 컸는지. 그러고 보니 우리 숙이가 이젠 어린애가 아니구만. 이젠 제법 처녀티가 나는데 ㅎㅎ…”하며 내 등을 토닥이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남자로 보여 소름이 쫙 돋아 어망결에 아버지를 확 밀어버리고 말았지요. “숙아 니 왜 이러는데. 아버지가 뭐 잘못한게 있나, 왜 우리 숙이가 이렇게 화가 동했는지 말이다.” 하는 아버지를 바로 보기조차 부담스러웠지요. 그 날 부터 어머니가 없는 날이면 뭔가 딱히 모를 위엄같은 게 조여와 잠도 바로 잘 수 없었지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말입니다. 그 때는 사회질서가 왜 그리도 물란했던지요. 불량배들이 수시로 여자 숙사에 침범하는 바람에 두려운 나머지 나는 다른 친구들 발치에 옹송거리고도 잠을 잘 수 없었지요. 머리에는 공부가 들어가기는 말짱 도루묵이고 날이 갈수록 공황장애만 커져 갔지요. 한번은 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왔다가 내가 얼굴에 피기도 없이 마른 버짐만 하얗게 번져있고 눈도 퀭해 있는 걸 보더니 당장에 짐을 싸서 집으로 가자고 했지요. 그날 아버지는 식당에 들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돼지곱창 볶음이랑 당면을 시켜주고 아버지 술 안주 1호인 건두부 볶음도 주문해서 술 한 잔 쭉 들이키며 “숙아 니는 아직 어리니 집에서 휴양 잘 하고 다시 학교 다니면 된다. 좋은 대학은 못가더라도 공부 좀 더해서 아버지 선생직을 물려 받으면 되니 걱정마라. 니가 철밥통만 있으면 앞으로 먹고 사는데는 지장 없다. 으흠.. 앗체…” 하며 아버지는 줄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지요. 속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제채기부터 하는 우리 아버지를 나도 어쩜 심통히도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령혼이 말라버린 내 신경이 완전히 낫는다는 건 어디 신이 아이고야 불가능 하였지요.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이런 나를 먼저 동네 중국 학교에 붙혀놓고 하루 빨리 내가 정상이 되면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한낮 꿈에 불과할뿐 철밥통을 이어 받기에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 불보듯 뻔하자 어머니 아버지는 내게 평생 밥 먹고 살 수 있는 손재간을 갖춰주려고 안달이였지요. 어머니가 하던 싹 바느질은 너무 고생스럽다고 어느날 어머니는 파마를 배우러 집을 나섰지요.

 워낙 손끝이 야무진 어머니는 파마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서 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서 몸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요. 일이 힘든 것보다 내가 입도 뻥긋 안하는게 어머니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했지 싶습니다. 작은 체구에 바싹 야위어진 어머니가 밤에 새우등을 하고 신음소리를 내도 나는 한번도 어머니 이불에 파고 들어 본 적 없었으니 얼마나 못된 딸이였겠어요. 어머니가 버티는데는 한계가 있더군요. 내가 어림잡아 혼자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말 수 있는걸 지켜보던 어머니는 위경련을 자주 일어키더니 12지장 암으로 결국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떠나면서도 이 딸이 어머니 임종을 보고 놀랄까봐 멀리 친척집에 보내고 내가 눈에 밟혀 눈도 못 감은채 두줄기 눈물만 남기고 운명을 하고 말았지요. 불쌍하기도 불쌍하지요 우리 어머니요.

엄마가 떠나고서야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뼈아프게 느끼며 아버지에게 서서히 다가서기 시작했지요. 작은 도시에서 아버지는 영화관 주임이였고 엄마는 백화점 수납원이라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국가 철밥통을 가진 부부였지요. 내가 4살 때 말을 제법하자 입양 사실을 알고 상처라도 받을가봐 중국지식청년을 따라 쥐도새도 모르게 야밤도주해서 먼 산동네로 이사를 왔지요. 내가 학교에 다닐 나이도 되였고 마을도 중국동네라 조선족 학교가 없는 것도 있지만 행여라도 그 지식청년이 소문을 낼 가봐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외가집에 보내고 조선족 마을을 찾아 다녔지요. 아버지는 마침 선생자리가 나져서 직장을 복귀했는데 어머니는 그만 직장을 잃고 말았지요.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키우느라 모든 걸 다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8살 때였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집에다 두고 나만 데리고 고향을 찾아가셨지요. 그날 아버지는 할아버지 령전에 무릅 꿇고 “아이고 아버지 내가 죄인이 옵니다. 최씨가문의 장손이 대를 끊었으니 우리 아버지 저승 가서 어찌 조상들 앞에 나서겠습니니까? 그런데 아버지 나 경순이 아니면 못 삽니다. 아버지 이제 그만 화 푸시고 경순이 맞 며느리로 받아주세요. 그리고 우리 숙이 아버지 큰 손녀 한번 보세요. 얼마나 귀엽고 이쁜지 모릅니다. 흐..흐..윽…” 하시며 나를 당겨 할아버지 앞에 절을 올리게 하고는 황소처럼 엉엉 울으셨지요.

봉건이 많은 세월에 최씨집의 장손이 복막염을 앓고 애도 못낳는 처녀를 맞 며느리로 삼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일이였지요. 아버지는 불효를 저지를 만큼 어머니를 억수로 사랑했는가 봅니다. 나는 어려서 부터 아버지가 만취가 되여 들어와도 어머니는 남정네들 옷이고 신이고 여자들 발에 차이면 안된다면서 마구 던지는 걸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 늦은 시간에도 술 취한 아버지를 위해 어머이는 꼭 김치밥국을 끓여 올리군 했지요. 나는 자는 척 하다가도 김치밥국이 상에 오르기 바쁘게 팔딱 일어나 한그릇 뚝딱 굽내군 했지요. 떡국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우리 빨래줄에는 늘 어머니가 손수 떡방아를 콩콩 찌어 채로 곱게 쳐서 만든 떡국이 주렁주렁 드리워져 있었지요. 

어머니가 김치를 송송 썰어넣고 끓이다 팍팍 으깬 반짜개 쌀을 넣고 떡꾹 한줌 동동 띄워 끓인 김치밥국에는 아마도 자식을 못 낳는 한 여인의 서러움과 아버지에게 죄스런 마음과 나로 인한 처절함이 한데 어우러져 맛도 별미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나는 세상살이 지치거나 힘들 때마다 어머니표 김치밥국을 끓여 먹으면 3년 묵은 채기가 쑥 내려가기라도 한것처럼 시원합니다.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근면하던 우리 아버지. 집에 오는 사람들을 맨입으로 보낸 적 없었던 게 우리 집 가품이였죠. 중국사람들도 최선생이라 하면 호인라고 엄지를 척 내밀었지요.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사람 없다지만 아버지는 술에 아픔을 담고 멀리 두고 온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 그리운 정을 주변사람들에게 배풀었던 것이지요. 한없이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했던 우리 아버지. 한번은 저녁에 앞집 총각이 놀러와 TV를 보고 있는데 내가 주방에서 발을 씻고 아무 생각없이 집안에 들어섰다가 그 총각이 가고나서 아버지한데 억수로 혼빵을 먹었던 적도 있었지요. 여자가 남정네들 있는데서 물소리를 내고 바지가랭이를 둥둥 걷고 대수롭지 않게 다니는게 당키나 하냐고 불같은 호통을 쳤댔지요.

내가 한국에서 돌아와 할빈이란 도시에 미용실을 오픈하던 날 아버지는 “우리 숙이 애들 데리고 다른거 하기보다 그래도 손에 익은 솜씨라서 밥은 먹고 살거다. ㅎㅎ…”하며 그렇게 좋아하셨지요. 아버지 생일 날 내가 준비해간 토종닭에 미역국을 끓이고 색다른 음식들로 상을 차렸더니 아버지는 “어이구 우리 숙이 참말로 장하네. 지 엄마 닮아 음식도 제법 잘하는데. 이젠 정말 우리 숙이 어디에 내 놓아도 걱정없겠다. 으흠…”하며 흡족해하던 아버지. 그것이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차려드린 생일상 일 줄이요. 새 엄마로부터 아버지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병석에 누워 코를 골고 있는 아버지가 푹 자고 나면 깨여나겠지 라는 생각밖에 못했습니다. 4월의 을씨년한 저녁 갑자기 아버지 몸이 사시나무 떨듯하며 두 눈을 크게 부릅떳다가 조용히 감으셨지요. 의사 선생님이 사망이라는 말에 나는 생 사람을 빼앗긴다는 기분이 어떤건지 뼈저리게 느끼였어요. 어쩌면 나랑 한마디 말도 안하고 아버지가 다시 못 올 그 곳으로 떠났다는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전날 저녁에만 해도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 “숙아 오늘 파마손님은 몇이나 있었냐, 우리 숙이 애들 거두며 혼자 많이 힘들지. 어이구…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고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속옷에서 겉옷까지 어느 것 하나 숙이 니가 사주지 않은 게 없구나. 내가 지금 등을 긁고 있는 이 효자손 까지도 말이다. 니가 지난번 보낸 금반지는 너무 커서 손에 걸리작 거리기도 하고 아버지가  팔아서 약 써버렸다. 아버지는 숙이 니를 키워서 늘그막에 덕 많이 본다. 친 자식 열 보다 우리 숙이 니가 낫고 말고. 오늘은 우리 숙이가 많이 보고 싶다. 어릴 때부터 숙이 니는 미운 구석이라곤 없었지. 이쁘고 귀엽고 인정스럽고 으~흐..음…”하며 울먹이던 아버지에게 나는 천하 몹쓸 짓을 했지요. “아~ 아버지는 왜 이러십니까? 이제 금방 개업했는데 어떻게 가겠습니까? 보고 싶더라도 좀 참으셔야지요. 아버지 지난번에 닭고기가 맛있다 하셨지요. 이제 며칠만 있으면 5.1절이라 학교에서 쉬면 내 토종닭 사서 애들한데 보내겠습니다. 나도 그만 힘들어 쉴렵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내가 미워 가슴 쥐여 뜯으며 한없이 울었지요.

이별이 영원할 줄 알았더라면 밤새도록 아버지랑 전화를 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니 밤에라도 택시를 타고 가서 아버지 생전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들어주었다면 얼마 좋았겠어요. 억장이 무너지고 땅을 치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아무도 없는 썰렁한 병실에서 오직 내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쩌렁쩌렁 울릴뿐이였죠. 갑자기 4살된 작은 딸이 문뒤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여 나는 애를 와락 끌어 안고 또 다시 애 이름을 부르며 경악을 해야 했지요. 비보를 받고 달려온 새 엄마에게 놀란 아이를 딸려 보내고 나는 마을의 몇몇 어르신들과 함께 아버지를 지키고 있었지요. 아버지는 그렇게 평온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칠성판위에 조용히 누워있더군요. 아버지 령구앞에서 나는 그 긴 세월동안 꼭꼭 닫혀있던 언어들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주라야 달랑 나 하나. 태를 묻은 한국 거창 달동네에 유년을 흘려놓고 7살에 뿌리내리고 자라던 만주땅 끝 마을을 떠나 타향에서 불쌍하고 외로이 생을 마감한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내가 세상에 홀로 서기만을 기다렸지요.

아버지 없는 세상은 정말 맵짜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게 징벌이라도 내렸는지 딸 둘 데리고 사는게 여간 숨 가쁘지 않았어요. 다행이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부터 내가 말문이 터져서 아버지랑 매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숨을 쉴수 있었지요. 아버지가 낮에는 해가 되고 구름이 되고 밤에는 달이 되여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세상 풍파 다 이길수 있더군요. 지금도 나는 겁이 많아 길가에서 강아지나 벌레를 보면 화들짝 놀랍니다. 그럴때면 언제나 아버지 검은 그림자가 얼핏 나타나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에 활랑이던 가슴을 진정할수 있지요.

지난번 병원에서 에마라이를 찍을 때도 무서워서 눈을 감고 이를 쪼아대는데 아버지 검은 그림자가 비치여서 말을 주고 받다 보니 우르릉 거리는 기계소리도 참을 수 있었어요. 내가 무슨 일이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꼭 내 꿈속에 찾아왔지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날이면 나는 뒤로 자빠져도 영낙없이 횡재 맞는 날이였어요. 내가 좋은 날 궂은 날 아버지를 찾으니 아버지도 지치셨나요. 아니면 세월에 끌리여 삶에 연연하며 살아가던 내가 세월 따라 삶을 조곤조곤 가꾸는 모습에 한시름 놓으셨는지요. 지난번 꿈에서 이제 좀 쉬겠다며 2층 다락 침대에 올라가 누우시더니 어쩌면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군요. 나 지금도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요. 그 때처럼 꿈에서라도 한번 찾아 오시면 안되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나랑 한마디 말도없이 사망시 가족에게 나오는 보상금이랑 저축통장, 집문서까지도 다 새 엄마께로 돌려 놓은 것도, 새 엄마께 종신보험을 들어준 것도, 어쩌면 당신의 화를 내가 아닌 새 엄마께 버럭버럭 낼수 있은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생각을 바꾸고 아버지 의사대로 다 새 엄마께 돌려주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잘했지요.

지난번 내 생일 날 말입니다. 미역국을 뜨다말고 갑자기 나를 낳아준 그 여자 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이제 외할머니도 됐겠다. 내 생일이면 돈 봉투에 선물까지 보내오는 효심 지극한 큰 딸에, 손 편지를 예쁘게 써주는 작은 딸이 있지, 또 주변에 고마운 이웃, 지인들, 특히 세상길이 막혀 숨을 쉴수 없을 때 내 마음을 콸콸 자아낼수 있게 이끌어 주는 평생지기도 생겼지, 아직은 어수선하고 넋두리같은 내 글에 애정을 담아주고 나를 아껴주는 문단의 많은 문인님들도 있지, 내가 복에 겨워 청승을 떨었다 아닙니까. 맹세하는데 내가 아버지를 배신한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노여워 마세요. 이제 와서 내 뿌리의 근원이 뭐가 궁금하고 가족 족보를 따진다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의연히 아버지 호적에 남겨진 아버지 딸이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물려주고 싶어했던 철밥통이 가끔은 부럽기도 합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미용기술로 애들 잘 키웠는데 몇 해 전 부터 약물 반응이 심해서 미용실도 그만 접었습니다. 미용실을 그만두고 밥줄을 잡은게 바로 가정집 일이예요. 오전 오후 두 집 일을 하는데 오전에 아침상을 봐드리는 집은 마침 경상도 집이라 식구들 모두 내가 하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오후 집은 재중국 한국인 집인데 주인들은 회사에 다 나가고 빈집에 들려 청소만 합니다. 주인과 부딪힐 일도 없고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내게 준 철밥통은 말입니다. 이 튼실한 두 다리랑 봉건 보수적인 교육이지 싶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피 한방울 안 섞인 나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 부은 것 처럼 나도 세상 돌풍에도 꼬꾸러지지 않고 내 가지들을 끼고 최씨집의 일원으로 최종 행선지까지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끝없이 용기와 희망을 보내주는 고운 인향들속에서 나를 갈고 닦으며 어머니 아버지 주신 이 생명을 윤택나고 아름답게 가꾸겠습니다. 아버지. 나 오늘 따라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 꿈에 한번 오시면 안되겠습니까? 아버지랑 나랑 속에 쌓아두었던 부녀의 애틋한 정을 술잔에 비우고 채우기도 하고 의지가지 없는 빈 세상에서 속풀이를 하며 살아 가는 내 글에 아버지의 따끔한 평도 좀 해주시고요. 술기가 얼큰히 오르면 서로 마주보고 재채기를 하며 우리는 천상 못말리는 부녀라고 배 끓어안고 웃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 나 이제 김치밥국도 제법 잘 끓이는데요.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 사장
17.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8.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 응모글 55 ] 길 by 최리경

[ 응모글 54 ] 다시 만납시다 by 김건

[ 응모글 53 ] 딸 반성문 by 전익순

[ 응모글 52 ] 피보다 더 끈끈한 정 by 박은화

[ 응모글 51 ] 한 여름날의 꿈 by 김은혜

[ 응모글 50 ] 촤충우돌 한국 생활 by 김경애

[ 응모글 49 ] 불효자는 웁니다 by 윤정화

[ 응모글 48 ] 예순, 새로운 출발점에서 by 고송숙

[ 응모글 47 ] 산책만필 by 김춘식

[ 응모글 46 ] 여기 있었네 보물이 … by 최정실

[ 응모글 45 ] 기잡이 by 최우림

[ 응모글 44 ] 서울 블루스 by 박은자

[ 응모글 43 ]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 by 김광림

[ 응모글 42 ] 내 사랑스런 제자에게 by 김미향

[ 응모글 41 ] 모국방문 여행기 by 사토우 시오리

[ 응모글 40 ] 타향살이 by 허은주

[ 응모글 39 ] 삶의 무게 by 배영춘

[ 응모글 38 ]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by 조옥순

[ 응모글 37 ] 딸애의 빛나는 청춘 by 정진

[ 응모글 36 ] 택시 by 김무성

[ 응모글 35 ] 약속시간 by 강희선

[ 응모글 34 ] 간병인의 수기 by 김은실

[ 응모글 33 ] 자유로운 나날들을 꿈 꾸며 by 박수영

[ 응모글 32 ] 남편의 좌충우돌 창업기 by 김복설

[ 응모글 31 ] <개구리>들의 사색 by 김화

[ 응모글 30 ] 솔파도는 바닷바람에 놀고 • 련봉산 by 강선화

[ 응모글 29 ] 우린 꿈을 위해 달리고 있을 뿐이고 by 림연춘

[ 응모글 28 ] 아부이야 by 최화숙

[ 응모글 27 ]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웃을 줄도 모릅니다 by 오기활

[ 응모글 26 ] 딸아이와 우리글 공부 by 허해란

[ 응모글 25 ] 나와 천사들 by 허순애

[ 응모글 24 ] 벚꽃 엔딩 by 정춘미

[ 응모글 23 ] 우리 아리랑을 위하여 by 리광식

[ 응모글 22 ] 나는 조선어문 교원이다 by 김경희

[ 응모글 21 ] 희비로 반죽된 어머님의 80 성상 by 방금숙

[ 응모글 20 ] 숟가락에 비친 사랑의 미소 by 김춘녀

[ 응모글 19 ] 형님과의 대화 by 방홍국

[ 응모글 18 ] 산은 언제나 그기에서 … by 량춘옥

[ 응모글 17 ] 20대의 끝자락 by 김홍련

[ 응모글 16 ] 위대하지 못한 유산 by 장범철

[ 응모글 15 ] 한국에서의 직장생활 수기 by 리해월

[ 응모글 14 ] 열정이 이끄는 나의 삶 by 박향화

[ 응모글 13 ] 담배한곽 by 금룡

[ 응모글 12 ] 가족사진 변천사 by 허순옥

[ 응모글 11 ]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며 by 박경옥

[ 응모글 10 ] 지금 나는 아이와 함께 성장중 by 황해금

[ 응모글 09 ] 내 친구들에게 by 조려화

[ 응모글 08 ] 뉴질랜드에서의 그때 by 남철우

[ 응모글 07 ] 새벽에 온 문자 by 황은실

[ 응모글 06 ] 엄마의 마음 by 현애옥

[ 응모글 05 ] 매화꽃 편지 by 최상운

[ 응모글 04 ] 호주에서 힐링하는 여자 by 리의정

[ 응모글 03 ] 천평 by 리홍화

[ 응모글 02 ] 저녁노을 by 태명숙

[ 응모글 01 ] 아침바람 찬바람에 by 최금화

쉼터미디어는 微信公众号가 아니므로 위챗 아이디로 직접 코멘트를 달 수가 없습니다.

코멘트를 발표하려면 상기 그림에 표기된 것처럼, 1, 2, 3의 필수내용이 다 적혀져야 4를 클릭해서 발표할수가 있습니다.

필수내용설명:
1. 문장독후감
2. 자신의 성명(실명 혹은 필명 모두 됨)
3. 메일주소
4. 상기 세 내용을 다 입력했을 경우 클릭하여 발표.

자신이 코멘트를 쓰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쓴 좋은 코멘트가 마음에 든다면, 엄지손가락을 눌러주세요.

Subscribe
Notify of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재미있었나요? 생각을 코멘트로 남겨주세요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