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21] 희비로 반죽된 어머님의 80 성상 by 방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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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장련, 음악편집 / 변소화

희비로 반죽된 어머님의 80 성상

글 / 방금숙

코로나 때문에 방콕을 하게 되여 청명절에도 산소를 못 가게 되니 문득 마개골에 계시는 어머님 생각이 난다…

결혼하고 첫 방학이였으니까 1983년 봄이 되겠다. 남편이 출장을 떠난 삼일간 우리 고부간에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어머님은 나에게 거북한 내 며느리로 돼 줘서 고맙다하시면서 세월의 메모리 속에서 당신의 파란만장한 추억을 더듬어 내는 것이였다…

세 자매 맞이로 태여난 어머님이 아홉살 되던 해였다. 아버지가 돈벌러 관내로 간다고 떠났는데 십여년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였다. 그래서 어머님의 엄마가 삯빨래를 해서 세 딸을 다 공부를 시켜 출세를 시켰다.

덕분에 룡정 개척의학원(해방전)을 졸업한 어머님은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동성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는데 어머님의 시누이 소개로 지신 중학교 교원인 아버님을 만나 1950년에 결혼을 하였다.

자그마한 키에 예쁘고 세련된 어머님과 훨칠한 키에 멋지게 생긴 아버님, 한 쌍의 젊은 부부를 보면서 사람들은 나무랄 데 없이 신통히도 꼭 맞는 천생배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당시에는 부부가 모두 교원인 가정이 흔치않다 보니 두 분은 뭇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였다. 금슬우지인 두 분은 출퇴근도 같이 하고 집안일도 서로 거들어 주면서 잉꼬부부로 소문이 나있을 정도로 다정하게 지내셨다.

결혼한 이듬해, 어머님은 예쁜 딸을 출산하였다. 첫 아이여서 그대로도 기쁨이였는데 열달이 되자 말을 하기 시작했고 어른들의 말을 곧잘 받아하여 어른들 뿐이였던 삶의 공간에 웃음과 행복을 갖다 주었다…

큰딸이 아장아장 걸어다닐 무렵인 1953년에 어머님은 둘째 딸을 출산하였다. 당시 남존녀비 사상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어른들은 허 씨 가문에 찾아 온 복이하라면서 못내 기뻐하셨다.

어머님도 자매로 키우면 애들에게 서로 친구가 되고 어선이 되여 서로 의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서운하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둘째 딸이 거의 돐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애가 전날부터 기침을 깇으면서 칭칭거리고 떼를 쓰길래 머리를 짚어보니 열이 났다. 괜찮겠지하였는데 한밤중에 열이 몹시 나고 기침이 멎지 않으면서 호흡하기 곤난해 하여 병원에 갔더니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다. 병세가 아주 심각하였다. 취침중인 로의사 선생들도 달려 와서 구급에 나섰지만 이미 절호의 치료 시간을 놓쳐 그만 요절을 하고 말았다…

어머님은 당신이 소홀한 탓으로 애가 잘못 되였다고 생각하면서 심한 자책과 아픔, 눈물과 후회로 가슴을 저미였다…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머님은 매일 밤잠을 이룰 수 없었고 어쩌다 새우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리군하였다.

어머님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집이 먼 곳에 있는 학생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고 강간너에 있는 학생들은 다리를 무사히 건네주고 하면서 일에 몰입하는 것으로 극력 아픔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던 1955년, 어머님은 아버님을 닮은 잘 생긴 큰 아들을 출산하였다. 허 씨 가문의 큰 경사였다. 대를 이을 장손, 범절 있는 양반 허씨 가문 장손이 태여나 모두들 애지중지하였으며 증조 할머니는 서낭신에게 기도까지 하였다…

이젠 마냥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1957년, 단란하던 가정에 비운의 그림자가 내리 드리게 되였다.

중학교에서 교도주임 직책을 맡아 보던 아버님이 워낙 약한 체질인데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쌓인 피로로 폐결핵병에 걸려 외지 병원에 가서 치료 받게 되였다.

하여 홀몸이 아닌 어머님은 바쁜 학교 일상 때문에 큰 아들을 농촌에 계시는 시댁에 보내야만 하였다. 애는 할머니의 보살핌에 무탈하게 건강하게 잘 자라줬다.

이듬해 봄이였다. 하루는 애가 배고프다고 하면서 할머니에게 파쌈을 먹고 싶다 하였다. 귀여운 손자가 먹고 싶다는 것은 열밤중에도 일어나 해 주는 할머니인지라 얼른 파쌈을 해 먹였다.

할머니는 맛있게 먹어주는 손자가 너무도 고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궁덩이도 다독여 주기도 하였다.

한참 후 애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할머니는 “할머니 손은 약손”하면서 배를 만져주고는 업어 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열이 많이 나는지 할머니 잔등이 후끈후끈해났다. 급해난 할머니는  애를 업고 동네 의사를 찾아 갔다. 의사가 침 한대를 놓으면서 괜찮을 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애가 설사를 하면서 고열이 났다. 당황한 할머니는 애를 업고 공사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이 먼데다가 마음이 급해 걸음도 잘 되지 않아 병원에 도착하니 애는 이미 고열로 중풍을 일구어 잘못되였다…

급작스러운 비보를 받고 달려 온 어머님은 경혹을 감추지 못했다. 하늘 땅이 빙빙 돌았다. 화는 홀로 안 온다고 남편이 큰병을 앓는데다 애까지 잘못 되다니…

당신 때문에 손자가 잘못되였다고 대성통곡하던 할머니는 거의 실신상태였다.

어머님은 차마 소리 내여 울 수가 없었다. 깨문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려 치마자락에 떨어졌다. 찢어지는 가슴에 싸늘한 시체가 돼버린 큰 아들을 마지막으로 꼭 안고 백지장 같은 얼굴에 볼을 비비며 소리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는 자나깨나 안고 놀던 볼을 심장 박동을 멈춘 작은 가슴에 안겨 주었다…

정신을 차리자 할머니는 또다시 땅을 치며 절곡을 했다. 어머님은, 애가 한명이여서지 절대 할머님의 탓이 아니라고 위안도 하고 안정도 시키고는 아들애의 후사를 처리하였다…

눈물을 뿌리며 집으로 돌아 온 어머님은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져 실컷 울었다. 아들애의 돐사진을 눈물로 적시면서…

홀몸이 아닌 어머님은  련속되는 비감으로 심각한 임신부종이 오고 혈압이 올라 끝내는 병원 치료를 받게 되였다…

여름이 가까워올 무렵 어머님은 둘째 아들을 낳게 되였다. 두 아이를 잃은 어두운 그림자에 몸과 마음까지 두려움에 묻힌 가족들은 출산일이 다가오자 어머님을 아예 연변병원에 입원시켰다.

모두의 바람과 같이 어머님은 안전하게 순산을 하게 되였다. 둘째 아들의 출산은 랭기가 돌고 썰렁한 집안에 온기를 갖다 주었고 웃음꽃을 피워주었다.

계속 치료중이던 아버님은 큰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타격을 받아 병이 더 악화되였다. 아픔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아버님에게 있어서 둘째 아들의 태여남은 삶의 희망이였고 병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의 원천이였다.

두 아이를 잃은 아버님은 뭐니뭐니 해도 운이 좋고 복이 있고 일들이 상서롭기를 바라면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吉”이라고 지어주었다.

그 해 겨울이였다. 탁아소에 보낸 대여섯달 되는 둘째 아들애가 갑자기 고열이 나고 기침을 깇고 입안에 흰색을 띤 붉은 반점이 나타나면서 목, 귀, 머리에서부터 붉은 반점이 나더니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홍역에 걸린 것이다.

당시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어 걸리기만 하면 줄초상을 치렀다.

마득하면 동양 민간신화에 홍역을 “손님”이라고 불렀을가?  당시로서는 걸리면 그저 무사히 낫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으니 질병의 신이 심술부리지 않도록 귀한 손님처럼 받들고 대접한다는 의미에서였단다.

서양에도 류사한 동화가 있다. 학교에서 일찍 조퇴하는 아이가 집으로 가는 길에  차례로 세 거인을 만났는데 세 거인이 아이에게 조퇴하는 리유를 묻자 홍역 때문이라 말하니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는 이야기이다.

얼마나 독한 병이면 동서양 모두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을가?

이처럼 무서운 병에 둘째 아들이 걸린 것이다.

당시 전 지신향에 70명 어린이가 홍역을 앓았는데 너무 심각한 상태라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어린 생명들이 매일 하나 둘 사라져 나갔다.

어머님은 애가 사경을 헤매여도 하루도 결근을 못하고  교학을 하면서 탁아소 보모들과 함께 짬짬이 시간을 타서 이불등을 뜯어 물에 져쳐 집안에 널어놓아 건조함을 막았고 좋다는 방법을 다 해보았지만 병은 차도가 없었다.

이미 69명 어린이가 생명을 잃은 상황이였다.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아들애를 넋놓고 바라만 보아야만 했던 어머님의 가슴은 바작바작 타들어 갔다…

이 위급한 시각에 동료 김은옥 선생님은 금방 큰 아들을 잃은 어머님이 둘째 아들마저 잃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추운 겨울날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데 왕복 60리 길을 걸어서 용하다는 의사선생님을 모셔왔다.

의사선생님이 오자마자 여러가지 대증요법으로 아들을 치료해준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겨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다…

감동한 어머님은 의사선생님과 김은옥 선생님에게 깊이 감사하며 아들의 생명의 은인들에게 백배사례를 하였다…

그 해 겨울, 아버님은 출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은  몸이 몹시 허약하여 출근도 못하고 치료와 겸해 집에서 몸을 보양하였다.

집에 계시는 날들이 많아지자 아버님은 바쁘신 어머님의 부담을 덜어 주고저 집안일들을 맡아 하고 애들도 돌보았다. 그리고는 시간이 나면 촌의 일들을 도와 주기도 하고 동네 어른들, 아이들의 머리를 도맡아 깎아 주기도 했으며  빛다른 음식들이 있으면 로인들을 모셔 술도 대접하군 하였다. 하여 로인들은 허선생이 오니 모두가 이웃사촌이 되고 사람 사는 동네로 변했다면서 그렇게 좋아하였다…

1960년, 어머님은 셋째 아들을 출산하였다. 아들을 여별로 두게 되자 어른들은 더없이 기뻐하셨다. 이미 두 아이를 잃었고 당신도 병환에 계시던 아버님은 셋째 아들이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라면서 이름을 “健”이라고 지어 주었다.

이름 덕분이라 할가 셋째 아들은 태여나면서부터 아주 건강하게 자라 줬고 서너살 될 때까지도 병원문전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애들 셋이 그런대로 별로 탈없이 잘 자랐지만 아버님 병세는 날로 못해 갔다. 때로는 자지러진 기침과 함께 각혈을 하군 했다.

어머님은 남편과 애들 때문에 시부모네 계시는 농촌의 소학교로 전근을 하고 애들에게 남편의 병이 전염될가봐 아버님과 어머님 둘만 학교 근처에서 집을 잡고 생활하고 애들은 할머님께 맡겼다.

어머님은 짬짬의 시간을 리용하여 아버님의 약을 달이고 몸에 좋은 음식들을 챙겨 드리면서 정성을 몰부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병은 정성도 마다한 채 차도가 없었을뿐만 아니라 각혈하는 차수가 잦아지면서 병상에 누워 일어나기도 힘들어 하더니 1966년에 불혹의 나이도 넘기지 못하고 38세를 일기로 저 세상 사람이 되였다. 년로하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 셋, 그리고 어머님을 남겨 놓고…

언제든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오리라 예상치 못한 어머님, 단 몇 년이라도 서로 아끼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싶은 어머님의 욕심은 하나의 꿈으로 사치로 신기루로 되여 버렸다.

서른 여덟에 청상과부로 된 어머님은 가슴을 도려내는 묵은 아픔까지 되살아 나면서 하늘땅이 곤두박질하고 삶이 산산조각났다…

혼승백강하게 된 아버님! 아버님의 타계로 사정없이 닥쳐 온 인생의 시련속에서 어머님은 오장육부에 가득찬 비통을 집어 삼키며 단전에 힘을 모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삶을 걸머져야만 했다…

낮이면 학교에 출근하여 강의를 하고 숙제검사를 하고 하학할 때면 가정방문을 하고 늦게서야 퇴근하군 했다. 저녁이면 집안팎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손을 내 주고 늦은 밤에야 허리를 펴본다 그것도 잠시, 세 아이들의 이튿날 학교, 유치원에 갈 때 입을 옷가지들을 챙기고 깁고 씻고 정리하면서 날을 새기가 례사로운 일이였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고 할 때마다 어린 아들 딸들이 잘 자라 준 덕에 주어진 가시밭길을 힘겨운 줄도 모르고 잘 헤쳐 나갔다…

막내 아들이 여덟살 되던 해였다.  소학교에 금방 입학하여 형님이 메던 책가방을 달랑달랑 메고 신이 나서 학교 가던 막내 아들이 초복날 방과 후에 어머님의 사무실 아래에서 까치발을 하고 어머님을 찾았다.

그날도 공개 교학 준비에 여념이 없으신 어머님은 곁눈질 할 사이도 없이 책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데 옆자리 선생의 귀띔에 밖을 내다보니 막내 아들이 유리창문의 모퉁이에서 얼음과자를 사달라고 흥얼거렸다. 어머님이 어해주면 버릇될가봐 살짝 눈을 흘기시니 혀를 홀랑 내밀고는 서운해 하는 기색으로 돌아선 막내 아들, 그것이 모자간의 마지막 만남이 될줄이야…

그 길로 또래들과 강가에 가서 고기 잡이를 하고 젖은 옷차림으로 돌아가던 막내 아들은 뉘집에서 토끼를 키우면서 굴에 전기를 가설한 줄 모르고 살창을 잡은 것이 전기에 붙어 비명에 갔다…

금방까지도 보았던 막내 아들이 죽다니? 맑은 하늘에 이게 웬 생벼락인가?

싸늘해진 아들을 망연자실, 넋잃고 보던 어머님은 아들을 와락 품에 끌어 안고 얼음과자를 안 사준 찢어지는 가슴과 얼음과자를 사주었더라면 하는 복배지수같은 후회에, 반생을 올곧게만 살아 온 나에게 왜 규환지옥같은 벌을 주냐며 통곡하고 절규하고 오열하다가 끝내는 실신하고 말았다…

예로부터 부모를 잃은 천붕지통보다 자식을 잃은 단애지통이 더 비참하다 했거늘 지아비 남편은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 법. 이미 두 자식을 묻은 만신창이, 피멍투성이 된 가슴에 막내 아들을 잃은 종천지통을 한이 몇 겹으로 응축된 가슴에 묻은 어머님은 쌓이고 쌓인 통한으로 곡읍하더니 목청이 갈리고 쉬여 끝내 목청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막내 아들의 얼굴과 얼음과자가 교차적으로 떠오르는 어머님은 막내 아들과 조석으로 뛰놀던 또래 애들을 차마 마주 할 자신이 없어 정든 사업터를 떠나 멀리 물설고 낯선 고장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각골지통으로 천인단애에 혼을 잃은 사람처럼 쓸쓸히 서있어야 했던 어머님은 온 몸의 세포가 애통에 절여있는 그 질식의 나날에 숨을 몰아쉬면서 죽음과 맞먹은 극대치의 고통을 짚고 일어서야만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아픔과 눈물과 비통으로 버무려진 어머님의 삶의 이야기에 천사만감이 교차되면서 고통과 희생을 삶의 철학으로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의 앞에 나는 숙연히 머리를 숙이였다. 그리고는  평생을 공경해야겠다는 생각이 울연히 일어났다…

간관유리의 세월이 흘러 어머님의 말씀대로  “죽다남은” 자식들이 성장하여 따님은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였고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고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사귀게 된 나와 결혼을 하게 되였다.

고락이 뒤섞이고 희비가 갈마드는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은 아들의 결혼식 날 저녁에 옷궤에서 흰 머풀러에 곱게 싼 물건을 꺼내서 상우에 정중이 놓으셨다. 아버님이 생전에 어머님에게 마지막으로 선물 한 갈색 코트였다.

어머님은 코트를 보면서, 유언대로 아들을 훌룡히 키워 대학공부를 시켰고 오늘은 착하고 참한 색시를 맞아 결혼도 시켰다고 여쭙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1년후 내가 아들을 출산한 날, 너무 기뻐 손주를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던 날 저녁에도 코트를 내려 상우에 놓으시고는 오늘은 대를 이을 떡판같은 손주도 보았느라고 멋진 할아버지를 닮아 잘 생겼느라고 자랑스레 여쭈셨다…

손주 사랑은 할머니라고 손주는 할머니에게 세상을 통채로 선물한 셈이였다. 산모의 산후 조리에 손주의 온갖 시중에도 입이 귀에가 걸린 어머님은 힘든 줄도 모르셨고 너무 조용해 옆집 아저씨 코고는 소리가 들리던 우리 집에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웃음꽃 피우는 삶을 시샘하듯이 비운은 또다시 우리 집을 기웃거렸다.

1992년 9월, 나는 온 몸이 해나른해 지고 힘이 없으면서 얼굴색이 까맣게 변하였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하였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에 자혈이 나오면서 더 심각해졌다.

덜컥 겁이 난 나는 병원을 찾았다. 간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의사의 말에 병원 천정이 빙빙 돌아가고 사맥이 탁 풀렸다.

이튿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진이기를 바라면서 다른 의사를 찾아 갔다. 부신암 같으니 빨리 큰 병원에 가 검진하란다. 두 의사분이 암이라고 하면 암이 틀림없겠구나하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 나면서 그 자리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찌해야지? 나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사십도 안 됐는데… 어린 아들은 어떡해? …)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집에 들어가니 출장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즉시 북경에 전화로 련락을 하고 이튿날 함께 북경병원으로 떠났다.

친척들의 알선으로 북경병원의 전문가들을 보이고 여러차례 종합검사를 하여 암은 제외되였는데 원인 불명의 의난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천운으로 살아났지만 하루밤 사이에 녀자의 이미지인 얼굴을 잃은 고통은 지옥에 떨어져 받는 도현의 고통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 버금의 극대치로 컸다…

억수로 속상한 나는 강의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서 거의 두문불출하였다.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시던 어머님은 당신 팔자가 사나워서 내가 앓는다고 생각하시면서 옷장의 높은 자리에 보관했던 코트를 내려 상에 모시고 정안수를 떠다 놓았다.

그리고는 상성한 사람처럼 집안의 크고 작은 짐들을 떠밀어 놓고 이 세상을 하직했으면 애들이나 무병하게 보살펴야지 라고 한바탕 긴 사설을 풀어 놓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절박한 감정으로 곡진하게 애원도 하면서 코트가 감동할만큼 긴 날들을 지성껏 기도를 드렸다.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덕이라 할가 얼굴이 낫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여있던 자혈들이 연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님의 정성어린 기도도, 또 용하다는 의사에 좋다는 약은 다 썼지만 나의 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루 이틀, 한두해에 나을 병도 아니였다. 하여 마음을 느긋하게 하고 병과 친구로 살면서 지긋이, 천천히 말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앓음 자랑에 강산이 한번 변했을 즈음에 남편은 학교의 크나큰 혜택으로 한국 경북대학교에 가서 행정윤리학 박사 공부를 하게 되였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공부를 하고 책을 보고 자료를 수집하고 론문을 집필하는 과정이 말그래로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렇지만 남편은 힘든 내색을 전혀 내지 않고 쇠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인내와 끈질긴 노력으로  학과목 모두 우수한 성적을 따냈으며 자랑스럽게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집필한 론문은 한국 반부패협회 우수론문으로 평선되여 증서와 상금을 수여 받았다.

남편이 피타는 노력으로 박사학위를 따내게 되자 어머님은 당신 생애에 최고의 선물이고 최대의 상이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

남편의 박사학위는 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나에게 무언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앓음자랑만 하던 나에게 있어서 박사공부는 하나의 선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나에게 학교의 혜택으로 조선의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서 언어학 박사공부를 할 수 있는 천혜의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남편과 가족들의 지지와 성원하에, 어머님을 복건에 계시는 시누이 댁에 모셔가는 “소동” 까지 피우면서 녀자 나이 오십에 뼈를 간다는 박사 공부를 하고저 2006년 3월에 조선으로 떠나갔다…

학교에 도착하여 모든 수속을 끝내고 강의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났을가?

학교에서 이른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나를 찾았다. 나는 의아해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고통사고로 연변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쩌다가… 나는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림 눈앞이 아찔해 났다. 출국한 사람에게 전화를 할 상황이면 아주 심각한 상태임이 뻔했다…

김일성 종합대학 대외사업국 리선생이 소식을 듣고 달렸왔다. 외무성에 귀국 비자를 신청하겠는데 제일 빠른 기일내에  비준하도록 최선을 다해보겠다면서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일주일만에 비자가 내려왔는데 조선 력사에서 전무한 일이라고 한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식불감 침불안의 날들을 보내야 했으니 그 일주일이 7년 맞잡이였다.

이튿날 나는 조선-심양행 비행기, 심양-연길행 렬차로 연길에 도착하자마자 연변병원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된 남편이 병원 침대에 꼼짝을 못하고 누워있었다. 나는 주체를 못한 채 남편의 손을 잡고 울었다. 남편은 그 험한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살아났으니까 울지 말라고 도로 위안하였다.

나는 마음을 눅잦히며 정말이지 살아 있어 고맙다는 말의 진의를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였다.

사고가 난 날 저녁, 남편은 혈압이 20까지 내려 갔다고 한다. 심장에는 물이 차고 폐에는 피가 가득 찼는가 하면 량쪽 갈비뼈가 죄다 부러지고 쇄골이 끊어지고  견갑골이 금이 갔다고 한다. 생생하던 앞이가 두대 부러져 나갔다. 말그대로 구사일생이였다. 의사선생님의 말로는 다행히 본인이 신체 소질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약한 사람 같으면 영낙없이 저세상 사람이 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쏟아지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사고 원인은 모 회사 기사가 술에 취해 운전을 하다가 교통규칙을 무시하고 건늠길을 건너는 남편을 사정없이 쳐놓아 10메터밖에 뿌려졌다는 것이였다. 말만 들어도 아찔해 났다. 하여 나는 사고소식을 절대 어머님께 알리지 않았다…

남편은 근 한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두 차례 수술과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여 집에서 운동과 영양보충으로 몸을 추스렸다.

수척해진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내 나이 오십, 펄쩍 뛰여 봤댔자 제자리인데 박사 공부를 해서 하늘을 찌르겠는가…어쩌면 내 운명에도 없는 욕심일수 있으니까 포기하자… 그리고 주어진 교학이나 잘 하고 남편 내조나 잘 하자…)

나의 이런 마음을 읽었던지 남편은 대학교원으로서 박사과정은 필수이고 쉽지 않게 얻은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나 몰래 도서관에 련계하여 한국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도록 련락을 취해 놓았다…

어떻게 말해도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하여 나는 그 해 9월 다시금 나의 두번 째 모교인 김일성 종합대학으로 갔다.

나는 더욱 더 이를 악물고 더 악착스레 시간을 쪼개 가면서 책을 보고 론문준비에 전념하였다.

워낙 신체가 허약한데다가 하루 세끼 식사 외 시간은 컴퓨터에 앉아 론문을 집필하다보니 경추며 허리가 아파나고 면역력이 떨어져 팔다리에 습진까지 생겨 매주 금요일이면 병원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3년동안 나는 지도교수님의 사심없는 지도하에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피타는 노력으로 “외국어로서의 조선어 실천문법”이라는 제목으로 된 근 30만자에 달하는 박사론문을 드디여 완성, 출판하였다. 그야말로 하늘땅이 맞붇는 고역이였다. 몸은 허약해져 체중이 5킬로그람이나 빠졌다…

이어지는 여러차례 론문심의에서 순리롭게 통과되여 최후 답변을 하게 되였는데 답변 자리에는 근 30명의 평심위원과 지도교수 그리고 유관 사업일군들을 모셨다. 나는 근 3 시간의 답변과정에서 열띤 질의에 침착하고 막힘없는 답변을 하여 조선 학위학직수여위원회 사업일군으로 부터 “몇 십년을 답변에 참가했는데 선생님처럼 답변을 잘 하는 분은 처음입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라는 과찬을 듣게 되여 전신에 전률을 느꼈다…

2008년 9월2일 나는 조선 만수대 의사당에서 박사학위 수여의식을 하게 되였는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위원장이신 곽범기 내각 부총리께서 나에게 축사를 하고 박사증을 발급하였으며 이어서 박사메달을 걸어 주었다.

수여식이 끝나자 곽범기 내각 부총리께서는 “방금숙 동무 기념 한장 남깁시다” 라고 하시면서 나와 강춘금 비서장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듣는바에 의하면 내각 부총리께서 외국인 박사졸업생과 사진을 찍기는 그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뜻밖의 감동이였다. 내각 부총리와의 기념사진, 이는 박사 졸업의 귀중한 선물로서 내 인생의 여백에 긴 여운을 남겨 주었다.

내가 졸업을 한 소식을 들은 어머님은 “우리 며느리 조선의 박사학위를 받았다니 내 평생에 원이 없다”하시면서 당신 돌아오시면 멋진 축하파티를 하자고 하셨다.

그 이듬해 여름, 어머님은 집에 돌아 오셨는데 그만 골반이 심각하게 골절되여 병원에 입원하셨다. 수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여서 보조적 치료를 받게 되였는데 어머님은 통증이 심할 때 마다 진통제를 드시군 하였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너무 안타까워 어쩔줄을 몰라 하는 나를 보시던 어머님은 너무 걱정말라고 도로 나를 위안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우리 부부를 부르셨다.

“내 두가지 부탁이 있다. 하나는, 내가 죽거든 수의는 룡정의 삼촌댁이 입히게 해라. 절대 남자들이 들어 못 오게 하고 손을 대게 말고…”

나는 어머님의 갑작스런 유언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머님, 벌써 무슨 그런 말씀하십니까?

“벌써가 아니다. 여든이 넘었는데. 대답해라 약속한다고.”

어머님 말씀에 깜짝 놀란 남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해 있는데 내가 대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어머님의 옷은 제기 입혀 드리겠습니다.”

“네가? 젊은 너에게 어떻게 그런 일 시키겠니…”

“이미 십여년 전에 친정어머니 마지막 옷도 제가 입혀드렸거든요”

 어머님께서는 눈굽을 찍으시더니 말머리를 돌리셨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토장을 해 줄 수 없겠니? 너네 아버지 돌아 가신지 40년도 더 넘었다. 나를 화장하면 재가 되여서 알아보지 못 하면 어찌겠니? 너네 아버지 줄 병원에, 료양원에 가 있다보니 같이 산 시간이 15년 된다 하지만 실제는 5년밖에 안된단다…” 말을 마친 어머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순간 어머님의 기구한 삶이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쳐 지났다…

나는 어머님의 두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걱정마세요. 제가 꼭 어머님의 부탁을 명심하겠습니다”

“네 말은 믿는다…”

어머님의 안색이 금시 밝아졌다. 눈물도 사라졌다…

이듬해 봄이였다. 석사를 졸업한 아들이, 어머님의 손자가 연변대학 조선어 학부 박사연구생으로 추천을 받게 되였다.

소식을 들으신 어머님은 병상에서 간신히 일어나셔

“우리 손자가 박사연구생이 되였다니… 오늘은 내 일생에서 제일 기쁜 날이다. 나는 오늘 죽어도 원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박사 엄마도 되고 박사 시어머니도 되고 박사 할마니도 되는구나…정말 죽어도 원이 없다…”

“그런 말씀 마세요. 손자가 박사모를 쓰는 것을 보셔야죠. 다 어머님의 공로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니 어머님은 오래간만에 환하게 웃으셨다.

병환에 계시던 어머님이 어쩌다 기분 좋아 하시는 모습이였다.

초여름에 접어 들어 매일 링겔로 지탱하시던 어머님은 끝내 병을 이기시지 못하고 2010년 6월14일 나의 품에서 영영 눈을 감으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큰소리로 어머님을 부르면서 목놓아 울었다…

나는 어머님과의, 아니 38세 청상과부가 40여년간

“마음의 파문 일으키지 않으리니

저의 순정 변함없는 옛우물이에요”

(波澜誓不起,妾心古井水)

(당나라 시인 孟郊의 ‘列女操’의 시구) 

이처럼 “변함없는 옛우물”로 살아오신 한 녀인과의 약속을 지켜 시신을 깨끗하게 닦아 드리고 마지막 옷을 입혀 드렸다…

정한 시간에 어머님의 시신은 한줌의 까만 재로 되여 나왔고 나의 마음도 골회 못지 않게 까맣게 탔다…

어머님의 골회함을 보는 순간 나는 만감이 교차되면서 장장 몇 십년간 고인이 된 남편을 일편단심으로 그려 온 어머님, 아니, 가엾은 한 녀인의 한가닥 간절한 소망을 들어 줄 수 없는 무거운 죄책감으로 끝내 오열을 하고 말았다…

삼년제를 지낸 2012년, 우리는 어머님을 아버님 곁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우리는 합장할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아버님이, 한줌의 재로 되여 찾아가신 어머님을 못 알아 보실가봐 어머님의 골회함에 아버님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선물하신 갈색코트를 입혀 아버님의 곁에 나란히 모셨다. 그리고 나는 어머님께 절을 올리면서 말씀드렸다.

어머님, 화장이 법으로 굳어진 현실에서 금과옥조같은 어머님의 유언을 도저히 들어 드릴 수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 들어드릴 수 없었던 약속에 대한 선의적인 거짓말을 이 며느리의 마지막 효도라고 받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오래 오래 행복하세요…

어머님과 함께 한 20여년이라는 나의 력사 속에 새겨진 못 잊을 추억이다. 오늘따라 어머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 모든 것이 풀리면 늦은 청명이라도 어머님의 산소를 찾아 뵈야겠다…

당나라 시인 리교(李嶠)의 “추석날 밤(中秋夜)”의 시구로 글을 마무리 하련다.

      “천리밖 그 곳 사정 알 바 없으니

       혹 비바람 불어칠가 우려되네”

      (安知千里外,不有雨兼风)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 사장
17.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8.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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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中善子
田中善子
2022년 4월 29일 8:18 오전

많이 부러워요 저도 협회의 한일원으로써 적극 동참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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