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Caraz컵 세계조선족글짓기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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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평
글 / 리홍화
언제까지였던지 ≪집≫ 이라면 나는 자연스레 엄마 아빠랑 형제들이 비비며 살았던 시골집을 떠올렸었다.
동쪽으로 네모반듯한 논밭을 멀리 넘어 나의 가장 먼 지평선에는 맑은 구수하가 은빛을 뿜었고 그 밀물속 큼직한 돌 하나 뒤집으면 털썩 들어붙은 검붉은 가재도 잡을수 있었다. 봄이면 북쪽 뒤골안 산기슭엔 어김없이 하야 말숙한 사과배 꽃들로 만발하였는데 내내 머리우에 배꽃이고 전지하고 땔나무 줏고 민들레 달래랑 캐면서 쉼없이 일하던 엄마아빠 모습으로 비껴있다.서산 기슭을 에돌며 마를줄 모르는 작은 도랑을 끼고 앞뒤로 넓은 터전을 독차지한채 찌그뚱 박혀있는 세월 먹은 초가삼간, 남쪽 창문을 열면 눈앞으로 상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유년시절의 꿈과 알룽한 기억들로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속 한자리를 더 깊이 파고 드는 고향집 전경이다.
80년대 중반 동구밖 큰 길을 꽉 메운 동네분들의 따뜻한 배웅속에서 입대하는 군인의 자랑을 함께 지닌 채 돛줄을 풀고 더 잘사는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첫 살림
90년대 중반, 대학 졸업한 이듬해 단위복리로 집값 반만 개인이 분담하고 아빠트 한채를 분배 받았다.
점수 순위로 꼴등인지라 70평 정도의7층 제일 꼭대기 집이 차려졌는데 총 금액 2만원 전부를 꾸어서 지불했다.내장 공사할 경제조건이 못 되여 그냥 친구가 선물해준 소파에 침대, 객실 반만 일본장판 쪼각을 펴고 아주 궁색한 살림을 시작하였다. 수압이 낮은데 증설이 안되여 수도물이 늘쌍 끊기여 어른이 들어가 쭝크리고 앉아도 충분할만치 우둔한 붉은 비닐통을 들고 5, 6층으로 다니면서 물을 길어쓸 때가 무척 힘들었던만큼 생각만 해도 도리도리질 나는 고생살이 집이였다. 그래도 대학 연애시절 추운겨울 삭풍에 돌돌 떨며 할빈 밤거리를 헤매다가 창가에 희미하게 비쳐오는 낯모를 불빛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일석지지가 차려지겠지 하는 갸냘픈 희망을 피워보던 때와 비기면 내 보금자리라는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풍족했고 사치였다.
허지만 한푼 두푼 아껴 모아서는 빌린 돈을 갚아야 되고 시골에 계시는 량가 부모님들의 생활난도 항상 어깨를 지지 누르고 있어 하루살이가 숨에 겨웠다. 하루하루 못해가는 시집 부모님들의 건강, 시어머니는 오랜 풍습에 심장까지 안 좋으셔서 내내 약을 달고 있었고 시아버지는 간공능 장애로 해마다 피수혈을 받아야 되고 영양도 챙겨야 된다. 동생 대학 입학때 달마다 링춘쩡취로 꽁꽁 모아 둔 돈에 동료분한테서 꾼 돈까지 합하여4,000원을 보내주었지만 일년도 안되여 하루하루 인상되는 물가로 추가되는 생활비때문에 친정 엄마는 나에게 편지로 어려운 돈 부탁을 하셨다. 동생에게 생활비 추가로 돈 백원만 부쳐줄 수 있겠냐고. 엄마는 부모 노릇 못해서 월급이 얼마 안되는 자식에게 자꾸 손을 내미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온다고 하셨다. 편지 쓰는 엄마는 돈 100원에 울고 편지 읽으며 울었던 나에게는 평생의 아픔이 되였고… 펴일새 없고 뒤쫄리는 살림이였지만 귀여운 아들애가 태여나 집에는 생기가 넘쳤고 이는 우리 부부가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더욱 강경해질 수 있는 젊음의 용기와 의지력의 련마였다.
그런대로 은행 울타리안의 생활은 항상 평화와 안정을 기반으로 규칙적인 움직임이 일상이다.바쁠 때는 잠간이고 대부분은 한가하고 대청 전체가 조용하다. 그럴때면 아줌마들은 끼리끼리 모여앉아 한국 드라마에 연예인 얘기로부터 화제가 자연스레 이미 정해진 코스를 따라 시집 흉보는데로 이끌어져 옳거니 그르거니 얼굴을 붉히면서 무의미한 론쟁에 포인트를 잡기가 일쑤다.
나는 아줌마들의 잡담에 끼여들지 않는다. 고객이 없을 때면 자기 사무자리에 조용히 앉아 책만 열심히 읽었다. 자격증 시험공부에 몰두하다보니 한담하고 보낼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저녁 시간에는 애가 잠들기를 기다려 보통 여덥시부터 열두시까지의 시간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는데 조용하고 고도의 정력을 집중할 수 있는 황금시간이였다.애쓴 보람에 운수도 따라줘서 3년사이에 중급 회계사, 경제 관리사 자격증을 따냈고 무작정 공인 회계사로 돌입하였다.
은행 국제업무부 종합이라는 남들이 감히 탐내보지도 못하는 중요 위치에 있으면서도 십년 근무했던 은행을 대담하게 버리고 여행용 가방만 씩~ 짊어진 채 빈털털이로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는 내 나이34살이라 도전의 마지막 기회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들인 공은 헛되지 않아 회계사 자격증 덕분으로 글로벌 상위 전자기업에 아주 쉽게 취직되였다. 이렇게2004년 여름, 안온한 고향을 등지고 소주에 정착이 되였고 이제부터 슬픔을 모르는 바쁜 벌이 되였다.
타향 살이
낯선 도시에 안착을 하면서 첫번째로 거처를 잡은 세집은 융린이라는 백여동의 오랜 건물로 빽빽한 규모 있는 동네였다. 다행이 교통이 편리하여 10분내 도보로 통근버스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주변에는 호성하가 흘렀는데 무더운 여름날 저녁이면 우리 부부는 강변을 산책하면서 피수도 하고 하루 업무의 긴장도 풀었던만큼 너무나 괜찮은 안식처였다.
70여평에 1층이고 기타 독신 두 사람과 합숙하였다. 광선이 약하고 조금 컴컴한 편이였지만 담장안에 꼭 둘러싸인 정원은 널찍했으며 구석켠에 실외 수도가 설치 되여 빨래 하고 널고 하기에는 아주 편하고 제법이였다. 담장밖에는 줄기가 곧고 수세가 웅장하며 우산처럼 넓게 펼쳐진 백년 된 녹나무 한 그루가 뜨락 안쪽 하늘까지 가리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엽전 1원이면 엄마랑 실컷 통화할 수 있는 공용전화 한대가 맞춤하게 서 있었다.
첫달 월급을 타던 날 이 공용전화로 엄마한테 전화하며 월급을 탔다고 기뻐했었다.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을 다 주니? ≫
엄마는 4,000원 월급이 믿어지지 않아서 반신반의 하시면서 물으셨다.
≪엄마두, 월급인데 당연히 주지, 진짜 큰 회사인데 ≫
우리도 잘 있고 이젠 돈을 많이 버니 근심하지 말라고 엄마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세집 길 건너에는 대규모의 따룬파 마트가 있었는데 밀집된 류동량으로 한밤중까지 시끌벅적이였다. 처음으로 이처럼 크고 상품이 풍성한 마트에 가서 가루비누랑 딱 필요한 생활용품 몇가지로 30원어치 챙겨들고 줄을 서서 결산을 기다리면서 슬그머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쇼핑카트에는 몇백원에 달할 것같은 물건들을 꽉 채웠는데 남새과일까지도 값싼 남새시장에 가지 않고 비싼 마트에 와서 구매하면서 금액수를 캐고 따짐이 없이 척척 지불하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차이, 미약한 소비력에 따른 경제실력의 격차, 심심한 느낌을 받는 나의 첫 체험 수업이였다.
3개월 견습기, 너무나 적합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견습기가 거의 지날때 쯤 회사에 적응이 제법 잘 되였고 피동이 아닌 주동적으로 업무를 찾아할 수 있는 열정과 작은 능력도 과시되였다.
열심히 노력하던 어느 토요일, 상해지사에서 진행되는 회사 운동회에 참가하였는데 행사가 거의 끝나갈 저녁무렵에 뜻밖으로 고향에 두고 온 아들애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아침 일찍 집을 나간 보모 아줌마가 날이 저물었는데 아직도 집에 안 돌아와 무섭고 배도 고프고 쿨쩍기리며 엄마한테 전화한 것이였다. 급한김에 이웃에 사는 동료언니한테 좀 다녀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애는 하루종일 빵쪼각으로 때를 에웠고, 밥가마에는 빠작 말라붙은 죽 깡치와 꼬실꼬실한 만두 조깍 하나 있소. 라면 한봉지를 겨우 찾아서 끓여주고 왔소≫
애가 나고 마음이 조급하고, 나는 동료 언니한테 고맙다는 인사외에 설음이 북받쳐 한마디 말도 더 잇지 못하였다. 상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내내 가만히 눈물을 훔치며 악착스러운 결단을 내렸다. 아들을 단방 소주로 데려 오는 일…죽을 먹든 밥을 먹든 셋이 같이 먹자!
아직 소학교 2학년인 아들애가 키를 목에 걸고 혼자서 학교에 다녀야 되는 상황이라 입학하게 될 학교 부근으로 세집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첫 세집살이 5개월 후 두번째 세집인 차이샹신촌으로 이사를 하였다.
비싼 집세 부담을 줄이려고 새로 맡은 세집도 객실 하나, 침실 두 칸이고 화장실과 주방을 공용하면서 두 집이 합숙하였다. 그 쪽도 세식구인데 남편은 외지에서 출근을 하는지 한주에 한번 정도 집에 다녀오는 것 같았고 녀주인은 작은 리발관을 경영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남자애가 있었다.
갓 성립된 회사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이 일뿐이였고 퇴근하면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나는 회사일에 뛰여다니고 경황없이 돌아쳤다. 맨날 저녁 열시를 넘겨야 집에 들어서는 엄마가 어린 아들 눈에도 가엾어 보였던지, 그 날도 저 녁늦게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니 애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침 준비를 미리 해두려고 주방에 들어가 밥솥을 여는 순간, 나는 놀라움 동시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키가 겨우 주방 싱크대를 넘길가 말가하는 아들애가 어떻게 밥을 앉혔는지 밥솟에는 물이 적어 땅땅한 밥이 한 솥 가득 있었다.어쩌다 쉬는 휴일이 되면 엄마 뒤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가는 어린 아들, 학기 중도에 전학을 하는 바람에 아직 새 학교에 입학도 못하고 잠시 가정교사를 찾아 집에서 뒤쳐진 공부를 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새 직장을 바꾸던 중 한 주간 잠시 집에서 휴식을 하던 남편이 나에게 엄청 무서운 일을 알려주었다.
낮이면 집에는 남자 손님이 자주 찾아오는데 방에선 이상한 동정이 들려오고 매일 데리고 오는 남자 손님이 바뀐다고 한다. 아마도 녀주인은 집에 사람이 없는 줄로 알고 맘 놓고 일을 벌리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대번에 한 곳으로 접점을 잡았다. 리발관이 색정 장소? 그 여자가 남편이 집에 없는 틈에 손님을 집으로 끌어오는 것 같았다.
한시각도 이 집에 멈추기가 두려웠다. 화장실도 주방도 객실도, 모든 표피에는 더러운 세균이 붙어있는듯 손 대기 싫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애에게 엄격한 단속을 하였다. 하루 빨리 이 추접한 집에서 탈출하려고 새 안식처를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당장 환장하기 직전이였던 어느날, 남편은 집에 연락을 한지도 꽤나 됐고 암투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시아버지의 건강상태가 걱정되여 형님한테 연락을 했다. 시아버지는 어제 돌아가시고 한참 후사 처리중이라고 하면서 남편이 고향에 다녀갔다 온지도 한달밖에 안됐으니 우리한테 너무 큰 부담을 끼칠가 일처리 마감하고 천천히 알리려 했다고 하셨다. 우린 정말 자식 노릇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갑갑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한심한 기억을 남긴 채 3개월만에 세번째 세집인 쑤안신춘으로 옮겼다.
세번째 세집은 대학을 곧 졸업하고 우리랑 같이 합숙하게 될 조카를 미리 대비하여 70평좌우의 침실 두 칸짜리 독집을 찾았는데 월세는 800원이였다. 알루미늄이나 금속 문광도 아닌 나무재질인 창문 틈새로 큰 바람이 들어와 문풍질을 하고 나서야 얼마쯤의 포근함을 느끼며 찬 겨울을 지낼 수 있을 정도였으니 특히 드문 골동 아빠트 였다.
학교가 멀어 매일 공공버스로 한시간씩 움직이는 아들에게 매일같이 하는 부탁이 ≪차에서 졸지 마≫ 였고 회사에 출근하는 어른들은 그런대로 다들 땀 흘리며 열심히 뛰고 있었다. 거의 일년을 지내노라니 헐망한 세집에도 하루가 다르게 재밋는 스토리들이 쌓여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식구가 제일 자주 모여 앉는 큰 침실 침대 맞은켠의 낡은 재봉틀우에는 14인치 흑색티비가 휑뎅그리 놓여있었다. 조카와 나, 아들은 늘쌍 침대 머리에 줄느런히 기대여 절목 구경에 열론을 즐겼는데 어느 한번은 침대가 꽝~하고 물러지는 바람에 지진이 일어난줄 알고 셋이 순간에 풀떡 뛰여내렸던 일도 있었으니 침대도 집과 꼭같이 골동이였던 모양이다.
밤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온 조카가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놀란 고함을 치며 뛰쳐나와 온 식구를 깨웠다. 벽에 검은 무엇이 붙어있단다. 겁쟁이 남편이 어쩌는 수없이 전등을 켜고 엉커주춤 들어가보니 낮에 친구가 보내준 귀한 양청후 게가 꽁꽁 묶어놓은 팔다리를 풀어헤치고 벽지를 따라 높은 곳까지 기여 올랐던 것이다. 침대밑이며 주방 등 구석구석 샅샅이 뒤졌지만 총 6마리중 5마리만 찾았고 한 마리는 끝끝내 실종되였다. 아마도 펄펄 끓는 물에 데워 죽기가 고형이라 6층에서 투신 자살을 한 것이라 매듭 지었다.
무더운 여름철, 냉장고가 없는 상황에 부근의 작은 마트에서 물이며 음료수를 자주 사서 마셨는데 한주에 빈병 80개를 페품 회수하는 아저씨한테 판 우리집 기네스 기록이 있다. 날이 저물면 밀차를 밀고 골목어구에 나와 꼬치 파는 젊은 부부의 단골 손님이 되였고 하루에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그들 부부가 몰래 부럽기만 하였다.
소주에 온지 일년이 훨씬 넘어 오면서 우리 부부는 점점 환경에 적응되였고 엄청난 계획을 굴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세집살이도 미쳐날 것 같았고 호구가 없으면 아들 학적이 없어 성급 고중 진학에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의 집을 마련하는 것,이 도시에 뿌리를 내릴 준비로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고향의 집을 팔집으로 내놓은 동시에 남편은 휴식일만 되면 소주 지도 한장을 들고 공공버스로 도시의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며 부동산 건물들을 깐깐히 훑었다. 경제부담이 허용하는 기본요소외에 학교구역 , 교통, 투자의 잠재적 가치 등등을 감안하며 내린 최종결정은 샹청취에 있는 115평 1층 아빠트였다. 단가는 3,500원으로 경제적으로 접수가 됐고 주로는 학교 옆이라 길을 건너지 않고도 직접 학교대문에 닿을 수 있어 아들 상학 근심을 덜수 있는 집이였다.
06년 여름, 2년만에 끝끝내 소주에서의 세집살이을 마감하고 내 집을 소유하게 되였다. 고향집을 팔아 선부금을 지급하고 부족한 큰 부분은 은행대출로 해결하였고 시누이들의 도움으로 간단히 장식을 하고 그렇게 바라던 꽃피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빠트 ,아빠트
(1)
은행대출 30만원에 장식에 꾼 돈까지 거의 40만원이란 거액의 빚, 방노에서 해탈은 우리 부부의 삶의 목표로 탈바꿈 되였다. 회사업무에 열중하여 좋은 고가를 받고 승진만을 위하고 달달의 월급을 모아 큰 돈을 만드는 것, 이것이 모든 고달픔을 잊고 새로운 열정으로 하루를 만들어가는 동력이고 힘의 원천이 였던것 같다.
금방 이사를 하여 거의 일년간 원구와 샹청취를 이어놓은 쌍꼬우루가 건설중이여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눈앞의 직선 거리를 50분씩 공공버스로 에돌아 출퇴근하였다. 해를 못보는 매우기는 진저리나게 길기만 했다. 길수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 비오는 날에는 험한 진탕길이라 장화신을 신고 버스역에 도착한 후 다시 구두신을 바꿔 신다보니 항상 신보따리에 가방까지 구질구질한 모양새였다. 이렇게 한시간반씩 헤매고 다니는 출퇴근 길도 힘든 줄 몰랐고 새집을 살구어 진짜 내 소유로 만들려는 결심에 나날이 충실하기만 하였다.
이듬 해, 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단다. 점점 움직이기도 싫어하시고 식욕도 많이 못해 지셨단다.
3월의 소주는 온 시가지가 꽃보라속에 파뭍히는 제일 이쁜 계절이다. 나는 결심을 내리고 항공권을 끊어서 부모님께 우편으로 부쳐 보냈다. 엄마가 돈을 많이 쓴다고 번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했지만 이번만은 무조건 나오시라고 명령식 요청을 했다.
떠나기 전날 많은 고향분들이 우리집에 인사를 오셨단다. 손수 다린 귀한 쌀엿이며 올망졸망한 말랭이들을 보내주셨고 평생 비행기를 못 타본 고향분들은 딸집으로 먼 려행 떠나는 엄마아빠를 무척 부러워하셨단다.
밤 11시가 넘은 한밤중에 엄마아빠는 우리 집에 도착하셨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밖에 바람쏘이러 나갔다고 알려주기에 베란다에 서서 아빠트 주의를 살펴보았더니 아버지는 정원에 이쁘게 핀 월계화나무 곁에서 터실한 손으로 큰 월계화 꽃잎을 만지락하고 있었다.
≪뭐 만짐니까?≫하고 물었더니 고향에 아직 눈무지가 푹 쌓여있는데 이렇게 이쁜 꽃이 활짝 피였기에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한다고 하셨다.
엄마랑 아빠를 모시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었지만 회사는 몇 일씩 연속되는 장기휴가가 안됐고 아들때문에 그렇게 많은 여유가 없었다. 겨우 천도호 3일유람을 떠났는데 아버지는 조금은 힘들어 하셨지만 너무 진진하게 구경하시고 배를 타고 노도 저어보고 경치가 멋있다고 탄복을 주셔서 그나마 자그만한 위안이 되였다.
이제 겨유 한달 푼한데 아버지는 고향으로 되돌아 갈 날을 손꼽아 헤아리신다. 아마도 비여둔 집이 근심스러워 그러시나, 돌아갈 때는 북경에 들러 셋째 딸도 만나보고 천안문 구경도 좀 하시라고 기차로 보내드렸다.
이번 여행은 엄마아빠 인생에서 유일하게 늙은 량주가 함께 연변주를 떠나 한 원거리 여행이 였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어느덧 옛말로 되고3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생활에서는 3개월만 회사업무에 집중 안하면 바깥 취급된다. 2009년에 들어서며 우리 부부의 월급 인상과 더불어 수입 상황은 대출 압력에 별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점점 거뿐하게 느껴졌고 앞당겨 은행대출 대부분을 갚아버렸다. 그러다나니 손중에 저금액은 거의 없었다.
그쯤에 온 길거리와 높은 건축물 벽에는 부동산 광고들로 꽉 채웠는데 죄다 얼마의 최저 가격, 어떤 할인방식으로 우대를 해준다는 내용들이다. 매일같이 뉴스에서는 많은 부동산 회사들이 자금 류동난으로 파산을 선포하고 상당한 브랜드 회사들마저도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도 한다. 부동산업은 나라의 경제명맥으로 기타 산업사슬과 금융전략에 연쇄작용을 일으키기에 지나친 약화를 바라지 않는다. 주식교역에서 또 자전거 리론이 있다. 증권거래소 입구 자전거 두는 곳에 자전거가 넘쳐나면 주식은 매도가 림박이고 문앞 상황이 그물로 새를 잡을 정도로 한산할 때면 매수 타이밍이다. 부동산 그라프에서의 바닥세가 아닌가 하는 결단이 들면서 우린 또 한번 큰 계획을 짜고 있었다.
우린 짬만 나면 아빠트 보러 다녔다. 내가 들고 다니는 빽에는 우리집의 전부의 저금인 현금 만원을 딸랑 넣고.
(2)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보도 듣고 두루 형세를 알아보니 아빠트 구매시 혜택이 참 많았다. 주택공적금으로 선불이 가능하고 은행대출도 공적금으로 갚을 수 있었다. 마침 우리 부부의 출 퇴근에 편리한 공업원구의 한 아빠트 단지가 마음에 들었다. 54만원의 총 액,저축된 주택공적금으로16만원의 선불금을 지급하고 40만원의 대출은 월공적금에 3,000원정도 보태면 상환이 가능하다. 만원을 계약금으로 지불하고 십년 대출기간으로 백평짜리 후분양 주택, 두번째 아빠트를 구매하였다. 현찰 만원으로 아빠트를 구매한 일은 우리 가족과 동료들에게 알려진 전설이 되였고 오늘까지도 절로 탄복되는 당당함이다.
2010년, 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고 가격이 치달아 오르기 시작하였다. 몇 달새에 샹청취의 첫번째 아빠트 단가가 만원을 넘기고 있었고 우린 이집을 팔기로 결정하였다. 부동산 중계에 팔집을 걸어놓고 한주만에 구매자가 나타났는데 낮에 한번 와보고 얼마나 마음에 쑥 들었는지 당일 저녁으로 계약체결을 하였다.세월의 헤택으로 나는 밤새에 백만부자가 되여 하늘을 날아보았다.
그 해 국경절 고향에 갔었다.
아버지의 건강은 훨씬 더 못해져서 문턱을 넘거나 특히 엄동겨울에 실외에 있는 화장실을 다니는 일이 엄청 큰 난제였다. 남의 집 울바자 밑에서는 못 산다던 고태아버지때문에 난 엄마에게 조심히 물었다.겨울에 장작 장만하고 불 때고 아버지 움직이기도 힘들고 연길에 집 사줄터니 이사를 하시겠냐고. 이튿날 엄마는 ≪아버지가 어제밤에 정말 연길에 집 사주냐고 가만히 묻더라≫ 면서 기꺼이 이사를 동의하셨다.
며칠 안되는 국경절 연휴를 이용하여 우리 부부는 연길에서의 아빠트 구매를 본격으로 진행하였다. 부동산 중계가 활발하지 못했던지라 창문에 붙힌 팔집들을 찾아 동분서주 하면서 철남 천신쇼취의 집 한채를 마음에 잡았다.1층이여서 아버지의 출입 불편함도 덜수 있고 마당엔 꽤나 부칠 수 있는 터밭도 있는 70평정도의 집이였다. 소주 첫 아빠트를 판 돈에서 19만원을 꺼내여 집값을 지불하였고 간단히 정리하고 추위가 들기전에 부모님들은 순리롭게 이사를 마쳤다.
돈의 투자와 소득을 따지면 당연 소주에서 더 큰 이익과 가치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평생 시골에서 고생하시고 이미 60중반을 넘기신 부모님한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연길에 집을 먼저 사는 것이 응당한 것이라고 적극 지지해 나섰던 남편이 마음속으로 진정 고맙다.
(3)
2012년, 통화팽창에 출현되는 백만원의 수자가 소비돈이냐 껌값이냐 하는 유행어들이 범람되며 안정된 우리 생활에도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비슷한 투자항목도 실물산업을 경영할 능력도 없고 첫번째 집판 돈은 은행 재테크로 거의3년 돌렸었다. 아들 장래나 우리의 노후를 고려하면 그래도 집 한채 더 사는게 방향이겠다고 생각되여 국 한그릇의 거리로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에서 도보로 십분내에 닿을 수 있는 단지에 새 집을 구매하였다.
100평 총96만원, 끌신에 케주얼 차림한 내가 현금으로 집값 전액을 지불할 때 부동산 분양사무실의 담당일군들과 주변의 고객들이 거의 비슷한 눈길로 나를 올리 보고 내리 훝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빠트 구매 수속을 마치고 흥분하고 들뜬 마음에 엄마한테 전화 했었다. 헌데 아버지가 안좋으셔서 형제들이랑 같이 입원수속을 밟고 있다고 하셨다. 그냥 3일만 관찰하다가 별문제 없으면 출원하니 걱정할가봐 안 알렸다는 엄마한테 집 샀다는 말은 꿀꺽 삼키고 병원비에 쓰라고 돈만 푼푼히 보내드렸다.
재물과 처자만을 아껴 부모 봉양을 등안시 하는것도 불효란다. 시골농사로 세자식 대학공부 뒤바라지에 껍데기만 남은 부모가 아프다는데 못 달려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무겁고 찹찹해지는 마음이였다.
천평
2017년 음력설 휴가를 마치고 소주로 돌아오는 중 연길공항에서 탑승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를 바래주고 집에 돌아가보니 운신도 못하셔서 대소변까지도 엄마 시중을 받던 아버지가 어떻게 출입문 어구까지 기여나오셨는지 그대로 엎어져 있더란다.
그 해 가을, 새벽 5시에 걸려온 엄마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고향으로 쫓아갔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 ≪아버지 내 왓슴다≫ 하는 나의 부름에 종일 혼미상테에 있다던 아버지가 천천히 왼 손을 드셔 내 손을 잡았다. 아버지와의 영별이였다.
2019년 아들은 끝끝내 영국명문대 석사과정을 원만히 마치고 순리롭게 취직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한쉼 돌릴 수 있었고…
2020년 음력설, 우리 가족은 국무원 춘절휴가일보다 한주 앞당겨 바라던 귀향길에 올랐다. 시급히 퍼지는 코로나 악화로 연길시거리의 백화점이며 시장, 음식점 등 전부가 봉업되여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요맛 저맛 못보는 유감이 많았지만 대신 집에 박혀 엄마랑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매일로 빠작빠작 눈길을 밟으며 모아산으로 운동다니는 별미로 하루가 즐거웠다.
매번 미루어지는 소주 공업원구의 회사복귀일에 두번씩이나 수속비를 지불하고 티켓을 변경하면서 회사걱정과 코로나 사태에 신경을 곤두 세웠지만 엄마한테는 아무티도 안내느라 애를 썼다. 객지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꼬박 28일간 엄마랑 설을 즐겁게 쇠였다. 엄마 구운 칼치 맛있다 하면 ≪그램 구워주지≫ 하시곤 빠작빠작 짭짤하게 열심히 구우셨고 ≪엄마 옛날 기름떡 구워 먹자, 엄마 감자 지짐 먹구 싶다≫하면 엄마는 ≪먹겠다는걸 못해주겠냐≫ 하시면서 구석쪽에 조용히 앉아 불고기판으로 지짐이며 기름떡을 쫀뜩쫀뜩 노랗게 정성들여 구워주셨다. 연변티비의 노래공부 시간에 엄마랑 같이 ≪미운 사랑≫을 따라 불렀고 정말 오랜만에 요청무대와 연변 소품들을 지진하게 감상했다. 하루저녁은 색 바랜 사진들을 한섶 널어놓고 그 중65세때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을 눈앞에 높이 쳐드시고 ≪요 정도 젊었어도 얼매 좋겠니≫하시는 엄마를 ≪장모 아직 60이래요, 백세 문제 없어요≫하며 북 쳐주는 사위때문에 환한 웃음을 눈가에 흘리셨다. 7, 8월에 회사가 정리되면 고향에 돌아와 엄마랑 우리 살던 동네에 집을 새로 잡고 나물도 캐고 가축도 기르고 채소 밭도 크게 가꾸면서 재밋게 살자고 반년만 기다려달라는 약속을 잡았다.
소주로 돌아오던 날, 반복되는 인사를 끝내고 택시에 오르며 이미 한발을 차안에 들여놓은 나의 오른 팔깃을 엄마가 다시 잡아 댕겼다.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
엄마는 다시 돌아선 나를 당겨 꼭 안아주면서 아주 서럽게 눈물을 흘리셨다. 번마다 휴가를 마치고 떠날 때면 멀어져가는 시야속에 눈물을 훔치는 엄마 모습을 보아왔던지라 울고있는 엄마을 그런대로 너무 쉽게 놓아주었다. 뒤 자석에 앉은 나는 혼자 쿨쩍대면서 이러는 엄마를 못내 나무랐다.
≪참, 안하던 짓 하면서..≫
9월말, 회사는 계획 일정보다 2개월 미루어 마감 정리를 끝냈다. 허지만, 4개월 전인 5월말,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엄마는 전조도 없이 급급히 하늘 나라로 떠나셨다.
엄마랑 통한 마지막 전화 :
≪ 회사 정리는 거의 돼 가니?≫
엄마의 마지막 일기:
26일 코로나: 미국 한국 중국 강소 소주 x명
27일,
28일… …
객지생활을 시작한 후로 엄마랑 같이 한 시간이 너무나 한심하게 짧았다. 그래서 펄펄하게 정정하게 약이란 입에 대지도 않던 엄마가 너무 아까와서 생각만 하면 더 마음이 아프고 후회로 가슴이 찢긴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아들 유학을 마치는 즉시로 과감히 회사를 접고 귀향길에 들어섰더라면 엄마의 인생의 마침표는 거기가 아닐 수도…회사일 마무리 하고 보상금도 다 챙기고 모든 정리을 깨끗히 마치고 귀향하려던 나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부모가 없는 집, 집이 없는 고향, 귀향길이 희미해졌다.
나의 삶의 질과 자식의 양육과 부모님께 응당 해야 되는 효도 사이, 쌓이는 재물과 엄마에게 남겨진 시간 사이, 부모의 평생 헌신과 내가 한 작은 일들과 부족함 사이, 효자는 못 되고 최소한 책임감으로 이 모든 것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천평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수 없이 만났던 흔들림과 방황앞에, 언젠가는 엄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드려야 된다는 참혹한 현실속에 자신이 지내온 힘들고 어려웠던, 그리움으로 얽혀진 타향살이를 돌이켜본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내가 걸은 이 길이 과연 정확하고 옳바른 선택이였는지…어디가 구경 환승역이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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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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