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17] 20대의 끝자락 by 김홍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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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장련, 음악편집 / 변소화

20대의 끝자락

글 / 김홍련

방황 속의 나, 나 속의 방황

김리안, 여, 29살, 백수, 이룬 건 하나 없지만 행복을 찾고자 한다. 나에게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고된 석사공부를 마치고 이제 꽃길만 걸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가시밭도 아닌 비포장도로였다. 퇴사한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대책 없이 무작정 퇴사를 하다니, 새로운 직장이나 찾고 그만두지, 다들 힘들게 사는 건데, 혼자 너무 유난스러운 것 아니야, 좀 만 더 시도해보지……” 종종 이런 뼈저린 조언을 들을 때면 그냥 멋쩍게 웃으며 넘기려고 한다.

실은 나도 내가 걱정돼 죽겠다. 가끔 자다가도 식은 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날 때가 있다. 불안하다. 취직 사이트를 열심히 뒤지다가 전 회사 구인공고를 보게 되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좀 만 더 버텨봤을 걸 그랬나, 내가 너무 서두른 건가, 아~~~” 후회가 밀려온다. 막상 퇴사를 하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실은 좀 많이 초조하다. 주위 사람들이 연민의 눈초리로 볼까 봐 서둘러 장황한 계획을 말한다. “음, 전 직장에서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일단은 좀 쉬려고, 그렇다고 무작정 쉬는 것은 아니야, 알바도 하고 있으니, 빨리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지 뭐” 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제야 안심한 듯 “그럼 어련히 잘 하리라 믿어, 힘내!” 라고 다독여 준다. 어쩌면 나의 자기 합리화를 진심으로 믿지는 않지만 믿으면 그대의 마음이 좀 편할지도 모른다.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계획대로면 퇴사하고 딱 한 달을 푹 쉬고 그 다음부터 열심히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 잘못됐는지, 분명히 오랫동안 쉬긴 했는데 왜 개운해지지가 않았을까? 오히려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은 더 큰 불안감을 몰고 온다. 백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제일 먼저 체감되는 것은 줄어드는 돈이다. 그래 돈이 문제였던 거야, 상해라는 곳은 숨만 쉬어도 다 돈이다. 돈이 없으니 모든 일들을 결정하는 기준이 싸다 아님 비싸다로 의외로 단순하게 결정된다. 무엇인가 계산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데 줄어드는 잔액을 보면서 또 계획을 세워 본다.

입사면접을 볼 때 본부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리안씨는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나는 자신감 있는 말투로 “저는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10년쯤이면 이 분야에서 업무도 잘 처리하고 어느 정도 관리직이 되었을 것이며 행복한 가족들도 있어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호기롭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사실이다. 나의 계획대로라면 최소한 첫 직장에서 3년을 해야 한다. 3년이 마치 무슨 곰이 쑥과 마늘만을 먹고 인내하여 사람이 되는 과정처럼 여러 사람이 봤을 때도 적당한 기간이다. 하지만 나는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생각했었고 더는 참지 못한 지점에서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 년 반 만에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나의 시간과 자유로 월급을 바꾸었다면 이제는 시간과 자유를 얻은 대신 월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퇴사를 결심한 것은 모든 직장인과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고 더욱이 상사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첫 사회 경험인 것만큼 나에게는 혹독했었다. 과부하의 업무량 그리고 심한 사내 정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나는 고래 싸움에 등골이 터지는 새우꼴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어떻게 반항을 할지도 모르고 그냥 이 모든 것을 다 자신의 탓으로 전가하면서 ‘착한 며느리’ 처럼 그걸 미개하게 참았다.

백수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건가를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29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나는 크게 꿈이 있었던 적은 없었고 잘 하는 일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런 내가 문제 있는 것 같다. 그걸 하지 못한다면 삶이 깜깜해질 것 같은, 그렇게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너무 생각 없이 살았나 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썼지만 왜 내 삶은 이 모양일까? 나도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과연 내 노력이 부족해서 이런 것인가 등등의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힘들게 했다.            

불안감이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매일 아침에 그날 할 계획을 적고 저녁에 체크해보기도 했다. 며칠은 잘 되는 것 같다가도 또 다시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고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불안감을 어떻게든 없애버리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8월에 소중한 사람의 죽음, 진로에 대한 불안감, 남자친구와의 헤어짐, 친구와의 트러블 등 문제들이 어느 한 순간인가 나를 삼킨 것 같다. 불행은 한 번에 닥친다더니 아홉수여서 이런 건가 보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었지만 이 우울한 감정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무한테도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방에서 멍하니 있다가, 울다가, 노래 듣다가 울다가, 예능을 보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모든 것이 무기력해졌다. 다행히 가족, 친구, 선배들의 도움이 컸고 나는 상해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에 들어가려고 했다. 상해에는 친구도 많지 않았고 가족도 없으니 항상 귀속감이 없었고 상해에서 백수 생활하기에는 경제적인 부담이 너무 컸다. 고향에 들어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다시 선택의 길목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로서는 더 생각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상태는 많이 안 좋았다.

고향에는 거의 십년 만에 다시 온 것 같았다. 고향은 눈에 띄게 확 달라진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나의 불안, 초조가 많이 나아졌고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가족이랑 소소하게 일상을 보내게 되어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고향의 삶은 따분하지만 익숙하다. 가끔 상해에 있는 친구가 언제 다시 나올 거냐고 묻는다. 그렇다, 고향은 미지근한 물처럼 무미건조하다. 하지만 여기는 힘든 나를 품어주었고 나에게 다시 앞으로 나갈 용기를 주었다. “상해는 음, 글쎄, 언젠가는 다시 갈 수도 있을 것이야, 모든 것은 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 자신이다.” 라고 말하였다.

어느새 나이 앞 자리가 바뀌게 되었다. 어른은 아니고, 그냥 서른이 되는 것이다. 동창들을 보면 이제 결혼한 사람도 있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승승장구한 사람도 있고 다들 발전해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처럼 이룬 건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고향에 들어와서 어느새 반년이 지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회사 동기들도 다들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잘 다니더라, 전에 만나던 사람도 자신만의 인연을 찾아 잘 만나더라, 나만 제 자리 걸음이더라…… 이 악마 같은 불안감은 엄청난 존재감을 보이고 있으며 잊으려고 할 때쯤이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방심할 틈을 안 준다. 한 평생 따라 올 셈인가 보다.

고향에서 30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특히 동북지역은 더 그렇다. 가족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려고 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대부분 비슷하여 코로나 이후로 불안한 형세에 다들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한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서 학원에 가서 문의해봤더니 학원 영업원의 말에 의하면 요즘 젊은이들이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공무원이나, 사업단위에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한다. 나처럼 이리 불안한 사람이 또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반급에는 학생이 한 60명 정도 된다. 대개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린 친구들이 위주였고 거의 서른 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우리는 학원에서 문제를 푸는 기교나 방법을 배운다. 나의 옆자리 친구는 아이가 3살인 애 엄마이지만 나이는 나와 같았다. 생일로 따지면 내가 두어 달 더 빠르다. 2년 전에 공무원을 준비했지만 1점 차이로 떨어져 이번에 다시 도전한다고 한다. 1점 차이라니 너무 아깝다. 누구나 불행이 자신만을 피해가라고 빌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여러 가지로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시간은 어느덧 2022년 2월이 되었다. 설 기간이라 여러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 많은 친척들은 내가 고향에 들어온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나는 우리 가족에서 처음 대학에 간 사람이었고 또 석사까지 하여 우리 가문에서 최고 학력을 가졌지만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공부도 할 만큼 한 사람이 왜 고향에 들어와서 허구한 날 공부만 한답시고 이러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나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여 공감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나는 이내 포기하였다. 내가 설명하려고 할수록 그들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그래도 젊은 사람이 나가서 세상과 부딛쳐 봐야지, 요즘은 공무원 시험도 쉽지 않다던데……” 그 순간 나는 왜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지 역정을 부리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모든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받는 일도 그 들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개개인마다 겪었던 상황도 경험도 다 다르기에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의 든든한 의지가 되어야 한다. “이 비관적 감정천지인 세상에서 희망을 찾자면 나라도 나를 믿어야 균형이 맞춰지질 않을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선배의 소개로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새 2년이 되어 간다. 처음에는 자원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내가 아이들로부터 더 많이 치유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 과정에 선생님을 해볼까 라는 생각이 조금씩 싹 트기 시작 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삶을 수 있다니 설렌다. 하지만 나는 또 다시 불안해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조선족 학교가 생원이 없어서 한 학기 지나면 학교가 없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으니 하물며, 지금은 출생률도 낮고 외국 이주 조선족도 많으니 어쩔 수 없는 현황이다. 언제 학교가 없어져서 전학을 가야 하는지 걱정을 하던 학생이 이제는 선생이 되어 이러한 불안을 또 겪고 있다.

나는 정규직 교사도 아니고 온라인 한국어 선생이다. 수입도 뭐 그냥 겨우 먹고 살 정도이다. 학생들이 수업에 흥취가 없고 잘 따라오지 못할 때면 계속 자신한테 물어보게 된다.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지? 선생님을 할 자격이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다 한 학기가 끝나고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발전된 모습이 보이고 부모님의 진심 어린 감사에 감동을 받고 희망을 품게 된다.

40년 교직생활을 하던 고모는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옛날에 선생님이 싼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다. 왜 그런 말이 있겠니? 그만큼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 학생의 인생이 너에게 달려 있다는 거다. 하지만 40년 선생으로서 너무 행복했고 조카인 꼬꼬(나의 애칭)가 이 일을 하겠다니, 마음속으로 너무 기뻤다. 시대가 변해서 고향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할 신세이고 앞으로 갈 길은 더 험하고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언제든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선생이 되어 눈빛이 흔들리면 학생들이 어떻게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겠니? 우리는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줘야 한다. 선생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돈을 벌기에는 힘들다. 하지만 돈보다 더 값진 것들을 얻게 될 거야.” 다소 너무 격동적인 연설이고 선생님이 직업병이 된 말투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도 가르쳐준 학생들이 선생님, 선생님하고 찾아오는 걸 보면 고모는 꽤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그렇다. 어쩌면 지금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보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것 또한 위기 속의 기회이기도 하다. 역사를 좋아했던 터라 중국 역사, 우리 조선족 이주사와 한국 역사 등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한글만 가르치는 것보다 역사, 문화, 한글 다양한 방면으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선생이 되려고 한다. 아직은 확신이 없지만 하다 보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불안, 초조, 방황이 반복될 것이지만 나는 스스로 자신을 위로해주기로 했다. 자신을 쓰다듬으면서 “지금, 이 방황,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너는 충분히 잘 했어. 불안과 방황도 이기려고 하는 것보다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자.” 이제는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을 몸과 마음이 깨닫도록 시간을 줘야겠다.

일하기 싫어하는 아버지와 나

어머니는 그랬다. 아버지는 일하기 싫어한다고…… 같은 핏줄인지라 나도 그렇다. 졸업하고 반 년 동안 백수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덧붙일 말은 없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백수생활을 하면서 어머니가 힘들게 번 돈을 기생충처럼 쪽쪽 빨아서 쓰고 있다.

우리의 일상은 아침 8시 반부터 시작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8시 반이면 출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대한 어머니 출근시간에 일어나 협소한 공간에서 같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어머니의 신경을 건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포장하고 싶지만 실은 나와 아버지는 아침 8시 반에 일어나지 못한다. 나는 매일 새벽 2시쯤에 자기에 아침 일찍 일어날 일 없고 아버지는 연세가 많지만 워낙 잠이 많으시다. 아버지는 어머니 출근한 후, 아침 9시쯤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신다. 우리 집에 가훈은 “식사는 꼭 제때에 해야 한다”할 만큼 아버지는 식사를 거르는 법이 없다. 아버지는 주방(주방이라 할 공간은 없지만 그 공간을 무엇이라 표현할지 모르겠다.)에 서서 물에다 밥을 말아 김치 몇 점을 올려서 쩝쩝 소리를 내면서 드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항상 복 없이 깨작거린다고 불평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쩝쩝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하며 뒤척거린다.

아버지는 깡 마르신 분이다. 168센치의 키에 62키로 정도 나간다. 웬만큼 덩치 있는 여자보다 말랐다. 나도 백수생활을 할수록 몸무게가 계속 줄어만 든다. 반대로 어머니는 살만 계속 찌고 있다. 가끔 어머니가 이렇게 살이 찌다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자주 아픈 것은 아버지와 나였다. 아버지는 한평생 한량처럼 살아왔다. 귀한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이른 나이에 신장암에 뇌졸중까지 오게 되었다. 나도 졸업한 후로 계속 아팠다.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이 대체 왜 자주 아플까? 의문스럽다.

저녁에 어머니는 퇴근하면 우리에게 “고문”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였냐고 물어본다. 딱히 한일은 없다. 나는 요즘 들어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쪼그려 앉아서 TV를 보다가 다시 잠에 들곤 했다. 머리를 맞대고 있는 벽지는 이상하게 누렇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 무엇을 했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우리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그건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피곤함에 찌든 표정이어서 우리는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는 답답한 나머지 아버지를 달달 볶는다. 아버지는 항상 묵비권을 선택하고 말이 없다. 집안은 조용하다. 시한폭탄이 떨어지기 직전처럼 고요하다. 이때 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만 윙 하고 들린다. 더욱 답답한 어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너무 화날 땐 입에 담지 못할 욕까지 하게 된다. 한평생을 아득바득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고 우리는 여전히 반지하에서 살고 있다.

계약만료로 우리 집은 반 지하에서 드디어 지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습하고 케케묵은 반지하 특유의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고 더는 반쯤만 들이 비추는 햇빛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경사가 높은 골목길 위로 신분 상승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 집 뒤에는 현대 아파트라 이 좁은 골목길에 10분에 한 대씩 마을버스가 다닌다. 부동산 중계사는 여기가 교통이 편리하다고 추천하였고 우리는 집세가 다른 곳보다 싸다고 생각하여 바로 계약하였다. 그런데 들어와서 살아보니 차 지나가는 소리에 집이 날아갈 것 같다. 이런 사기꾼 놈들! 게다가 저녁이면 배달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언덕이 높아서 오르려면 가속 페달을 정신 없이 밟아야 한다. 위위윙~ 위위윙~ 언덕을 올라서야 서서히 사라지는 소리이다. 내 방은 바로 길 옆이라서 침대에 누우면 마을버스가 지나갈 때의 진동이 소리보다 더 빨리 전달된다. 가끔 이러다 마을버스가 내 방으로 들이받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매번 오르락거리는 차에 힘을 실어주려고 한다. 무사히 언덕 위로 올라서기를 말이다. 무더운 오후쯤이면 내 방에 강력한 햇빛이 직사하여 공기 중에 먼지가 한결 더 잘 보인다. 10분에 한번씩 먼지들도 격렬히 운동을 한다. 이른 새벽 2시쯤 되어야 조용해진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마을버스도 애니메이션 <토토로>에서 나오는 고양이 버스였으면 좋겠다. 언니와 나를 태우고 고향 집으로,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 곁으로……

아버지는 어디서 진득이 일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항상 큰 보따리를 메고 돌아다녔다. 새로운 직장에 가서 며칠 하지 못하고는 집에 온다. 갈 때는 늘 “이번에는 일이 괜찮으면 쭉 해야지, 3년 만하고 중국 가야지, 가야지!”라고 자주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큰 보따리에 새로 산 여행용 칫솔과 슬리퍼를 들고 다시 집에 오기가 일수이다.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사장이 사람을 무시 한다거나 저녁에 야근을 시키는데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등 이런 것이다. 어머니가 듣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핑계일 따름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게 과연 합리한가? 다만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참았을 뿐이 아닐까? 아버지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서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에 어머니는 분노한다. 대체 왜 이러냐고…….

실은 나도 아버지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처럼 아버지한테 왜 그러냐고 묻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대체 왜 그러냐고, 왜 말을 더듬냐고, 왜 본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쉽게 포기를 하냐고, 내 눈에는 아버지가 너무 이상했다. 일 년 전 지방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이 삐뚤어져서 왔다. 아버지는 뇌졸중이 왔고 다행히 심한 경우가 아니어서 앞으로 술, 담배를 끊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많이 호전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단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2018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하지만 매년 여름이 유난히 더웠고 매년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하염없이 울면서 “어찌게”하는 것이 너무 싫었고 언니가 항상 부정적으로 아버지의 병세를 판단하는 것도 싫었다. 부모님이 점점 나이가 들고 쇠약해질 때 자식은 나로서 이걸 어떻게 대처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상해졌다. 아버지는 길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늦게 집에 가면 항상 마중하러 나오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고 불안하여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갖 무서운 상상들이 떠오르며 심장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그냥 눈물이 났다.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다시 전화를 걸어 아버지한테 화를 냈다. “지금 어디냐고, 거기가 어디냐고, 무슨 건물이 있냐고 내가 갈 테니 제발 가만히 있어라고, 제발, 제발!” 나는 울부짖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어눌한 말투로 앞에 XX병원이 있다고 하였다. 다행히 집 근처 병원이어서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마중하러 나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고는 앞에서 씩씩거리며 먼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잘못을 한 어린이처럼 주눅이 들어 어찌 할 줄을 몰랐지만 밤길이 위험하다고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뒤를 따라 왔다. 우리는 말없이 골목길을 올라섰다. 예전에는 내가 아버지 뒤를 따라다녔지만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내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나의 모든 인내심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만 남겨 준 것 같았다. 약을 드시는 것도 분명히 설명서가 있고 약 봉투에 설명이 있는데 아버지는 제 시간에 약을 드시지 못했다. 나는 범인을 심사하는 어투로 왜 글자를 알면서 이러냐고, 뭐라고 씌어 있는데 등으로 아버지를 비난했다.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제발 xx하지 마세요. 제발요. 엄청 화를 내고는 또 스스로 무한한 자책에 빠지게 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못 되게 굴었을까? 작은 일에 자주 짜증을 내게 되고 후회를 반복하며 스스로 괴로워하였다. 나의 영웅은 어느 순간부터 골칫덩어리가 되었고 생각 만해도 맥이 빠지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때 나는 석사논문 발표에, 이사에, 언니 결혼식 준비에, 부모님 병원행에, 여러 가지 친척들의 일들로 하여 너무 지쳐 있었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다. 나는 아버지 보고 “아버지, 나 너무 힘들어 숨통이 조이는 것 같아요. 제발 이상한 행동을 하지 마세요.” 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는 너무 투박하고 퉁명스럽다. 아버지가 아픈 후로 내 마음속의 영웅은 죽은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빛나지가 않았고 초라해 보였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는 어느 날인가 이런 말을 했다. “너희를 키울 때는 진짜 가난했고 너무 힘들어도 우리는 한 번도 너희를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식인 너희는 힘들 때면 늘 우리부터 버리려고만 한다.”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어머니는 하고 있는 식당 일이 여간 힘든지 요즘은 자주 구인광고를 본다. 어머니는 한글을 잘 몰라서 일단 벼룩시장 구인공고를 보는 것부터 일이다. 겨우 알아보지만 또한 전화 면접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나이 60세가 되어가지만 29세의 나와 비슷하다. 전화할 때면 긴장되어 연변 사투리가 막 튀어나온다. 나도 그렇다. 한국어를 전공하여 각별히 조심하느라고 하지만 긴장되거나 하면 불쑥불쑥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전화 면접을 통과한들 식당을 찾아가는 것도 문제이다. 한국은 워낙 골목길이 많아서 거기다 글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고, 핸드폰 지도 앱도 사용할 줄 모르니 얼마나 힘들까? 다행히 어머니는 일을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사람이라 일당으로 갔다가 사장이 마음에 들어 식당 직원으로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아버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경우이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시며 쉰다는 것을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신다. 어머니는 가난에 찌들었던 사람이라 가난을 무서워하며 어떻게든 뿌리쳐 보려고 한다. 하지만 가난은 꼬리표처럼 우리 가족에 따라다녔고 어머니를 괴롭혔다. 본인은 악착같이 생활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한 번도 나더러 빨리 취직을 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에 대해 항상 관대하시고 좋은 부모를 만났으면 이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을 하신다. 이런데도 나는 어머니가 많이 어렵다. 네 살 때부터 어머니는 러시아, 한국을 전전하며 일을 하셨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너무 컸고 어느덧 24살 후에 다시 만나 같이 살자니 아주 많이 불편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전에 못 다한 관심과 사랑을 주려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때를 지났다.

“너는 항상 아버지 편이구나” 어머니의 나지막한 한마디이지만 나에게는 가슴에 커다란 쇠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가족끼리 왜 편을 나눠야 하고 왜 어머니가 아버지를 욕할 때 우리는 아버지를 도우려면 그것은 아버지를 편드는 것이며 어머니를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나는 몰랐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흉을 끊임없이 쏟아 놓으며 서러움을 해소하려고 하지만 나는 가만히 들을 수 만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항상 팽팽한 줄처럼 조심스럽다. 그러다 요즘 내가 아버지한테 자주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보면서 놀랐다. 어머니를 꼭 닮은 모습에 말이다. 분명 잘 하고 싶었다. 누군들 가족과 얼굴을 붉히면서 살고 싶을까? 삶이 너무 고달프니까 이렇게 된 것 아닐까? 조금 전만 해도 귀한 내 새끼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하는 게 가족이 아니던가?

부모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면 마음이 항상 울컥한다면 당신이 좋은 아들딸이 아니라고 들었다. 내가 그렇다. 퇴직금 정산 등 문제로 아버지가 전에 일하던 회사에 가서 짐을 정리하였다. 아버지 자리에는 큰 주머니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엄청 많은 과자가 있었다. 이상하다. 아버지는 매끼에 꼭 밥, 반찬, 국이 있어야 식사를 하시는 분이다. 더욱이 과자 같은 군것질을 절대 하시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야근을 하고 오면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은 없고 회사 근처에는 모든 것이 비싸다고 회사에 갈 때면 항상 과자를 사가셨다. 아버지는 이 세상 모든 부조리에 맞서 싸우면서 굽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이 가족, 이 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한 번도 부모님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왜 그랬을까? 왜 하필 내가 제일 힘들 때 다들 이러는가? 그리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처음 부모를 하는 것이고 우리도 또한 처음 자식을 하는 것이라 너무 서툴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은 인생 최초의 것들이었고, 그래서 어려웠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우리가 체감하는 온도는 너무 높았고 안절부절 못하여 땀이 뻘뻘 흘리며 언성을 높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병은 퇴행성이라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고 악화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길을 찾지 못할 때 얼마나 속이 타고 가슴이 조이고 식은땀이 났을까? 본인이 제일 속상했을 것이다. 딸인 나는 본인이 힘들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너무 무례하게 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쭈그려 있기를 좋아한다. 티비를 볼 때도 쭈그려 앉아서, 밥 먹을 때도 쭈그리고, 무심결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봤을 때 나도 그러고 있었다. 이상하게 쭈그려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내 안에서 비집고 나오는 부모님의 모습과 마주하는 순간이 자꾸 늘어나자 나는 부모님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덧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세상에 이리저리 치인 나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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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크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8.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19.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0.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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