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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의 중국정 (2) by 길림신문 특파원기자 리홍매 / SHIMTO Media 2019.12.23

「중국귀국자・일중우호회」임원들.

쉼터편집의 말

전쟁의 잔류고아로서 중국과 일본에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이케다 스미에씨의 사연 2탄, 전쟁은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지만, 사랑은 오랜 시간속에서 다시 마음을 모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길림신문 특파원기자 리홍매 선생의 인터뷰기사로 함께 보는 일본잔류고아의 삶, 세 편중 두번째 편입니다.

운명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1987년 2월부터 사쿠라공동법률사무소에서 번역일군으로 근무하게 된 서명은 가와이변호사와 함께 전쟁고아들의 국적취득을 돕게 되였다. 그동안 근 1300여명 잔류고아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을 만큼 전쟁고아들의 사연은 기막혔다.

일본어교실

이마무라 아키코로 일본국적을 받고 경제형편이 안정되자 남편이 잔류고아가족의 신분으로 일본에 올 수 있게 되였다. 그제야 다섯식구가 단란하게 모여 살게 된 그들은 친부모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채 13년 세월을 보냈다

1994년 12월 4일, 변호사사무소에서 조직한 전쟁고아 설명회가 있었다. 통역을 맡았던 서명은 설명회가 끝난 후 몇몇 전쟁고아들과 함께 평소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커피숍에 들어 가게 되였다. 때마침 그번 활동에 참가했던 일본녀성 두분도 커피숍에 들어 왔다. 그중의 한분이 서명에게 물었다. 

“이마무라씨는 어떻게 중국어가 그렇게 류창해요?”

“저도 전쟁고아입니다. 13년전까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살았습니다.”

“목단강? 성은? 몇년도 생이예요? 우리도 거기서 살았는데…우린 열달 된 동생을 리씨성을 가진 집에 두고 왔습니다.”

“저도 리씨집에서 좀 살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성은 서가입니다.”

“리씨가 뭐하는 사람이였습니까?”

“목수…”

두 녀인이 서명에게 목단강시 어느 마을에서 살았는지 그당시 지도를 그려 줄 수 없냐고 간청했다.

“여기가 목단강일본인 난민수용소, 여기가 기차역, 여기가 리목수네 집, 여기가 태평로, 여기가 일본인거리…”

양모한테서 듣고 또 들었던 당시의 마을모습을 서명은 상세하게 그렸다. 갑자기 두분중 한분이 웨치듯 말했다.

“네가 내동생 스미에(澄江)야!”

“설마…아닙니다.”

“스미에 나 큰 언니야. 너를 리씨목수네 집에 보낼 때 내가 같이 갔었어. 엄마가 너를 살리려고 널 남기고 왔어…”

그분은 자기가 그때 여덟살이였던 큰 언니라고 서명을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어서 같이 집에 가자고 손을 잡아 끄는 그분을 보면서 서명은 랭정하게 말했다.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확실한게 없지 않나요.”

아무리 비슷한 경력이라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때는 가족을 찾는다는 기쁨보다도 가족이 아닐 경우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가와이변호사와 상담한 서명은 다시 한번 실망할 각오로 일본후생성(厚生省)에 친자매확인 DNA검정을 의탁했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며 그들의 DNA검정은 도꾜,오사카,교토,히로시마,가고시마 등 다섯곳에서 진행되였다. 행운만을 빌었던 17개월이 흘렀다. 1996년 7월 31일, 세사람은 일본후생성에 와서 결과를 알아 가라는 통지를 받고 무거운 심정으로 회의실에 모였다. 친자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숨막히는 순간이였다. 

기자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조심스럽게 결과가 발표되였다. 99.9%의 확률로 세사람은 혈육검정을 받았다. 그동안의 설음이 북받쳐 오른 서명은 믿을 수 없어서 검정서를 몇번이고 들여다 보았는지 모른다.

서명이로 37년을 살았고 13년을 이마무라 아키코로 살아온 그는 그제야 진정한 자기를 찾게 되였다. 이름은 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 1944년 10월 14일에 태여 난 원숭이띠였다. 양모집에 왔던 날을 생일로 정하고 살았던 닭띠의 서명이가 하루만에 한살 더 먹은 셈이다. 호적에는 사망으로 적혀 있었고 막내였던 자기 아래로 남동생이 태여나 있었다. 생부는 씨베리아에 포로로 끌려 갔다가 일본에 돌아 온후 2년만에 병으로 돌아 갔고 생모는 DNA검정이 끝나기 반년전에 돌아갔다고 언니들이 말해주었다. 

며칠 후 부모님 묘소로 찾아 간 이케다 스미에는 절을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엄마, 왜 나만 버리고 왔어요? 왜?”

인생을 통채로 바꿔 놓은 세월이 원망스럽다고, 죽더라도 엄마품에서 죽는 것이 행복이였을 수도 있었다고, 한번도 만난적 없는 생모를 부르고 또 불렀다.

52살이 된 해에 진정한 자기를 찾은 이케다 스미에는 자신을 행운의 고아라고 하면서 결코 모든 고아들이 다 그처럼 순조로운 귀국생활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패전이라는 준비없는 혼란속에서 친족간의 증거물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였고 일부 브로커들에 의한 가짜 일본인고아들이 하나 둘 고발되면서부터 부모 외의 가족들이 아예 혈육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일본에 귀환된 70%에 달하는 잔류고아들이 아직 혈육을 찾지 못하고 고아인 채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더우기 몇해전까지만 해도 최저생활보조금 외에는 전쟁고아들의 생활보장에 대한 일본정부의 특별정책이 없었다.

패전 40년만에 돌아 오기 시작한 전쟁고아들 대부분이 40살을 넘어섰다. 언어의 장벽과 그동안의 인적인 공백으로 인해 가족들사이에서 짐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고립적인 위치에 놓여지게 되였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전쟁고아로 될 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임은 일본정부가 반드시 져야 한다.”

이케다 스미에는 전쟁고아들의 창구로 되기로 결심했다.

2001년, 우선 관동지구에서 중국귀국자의 인권과 로후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국가배상소송원고단>을 결성하고 집단소송을 일으켰다. 그후 전국적으로 15곳에서 원고단이 결성되였고 잔류고아의 90%에 달하는 2213명이 원고로 나섰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 시위행진을 했고 113만명 일본인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일본인 변호단과 일부국회의원들의 협력, 그리고 사회 여러 면의 지원을 받으면서 5년간 분투해온 소송은 결국 패송으로 끝났지만 일본사회에서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잔류고아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7년 말, 일본정부는 드디여 새로운 <중국잔류일본인지원법>을 공포하였다. 2008년부터 국민년금의 전액지불과 생활보조금지불, 활동비지불, 거주주택비와 의료비의 면제 등 새로운 정책이 실시되였으며 각 지역에서의 일본어교실과 교류활동이 조직되였다.

잔류고아의 집

2009년에 개설된 “중국잔류고아의 집”

남은 과제를 계속 해결해가고 안정된 로후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잔류고아들에게도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했다. 하여 2008년 3월 집단소송중에 결성된 단결력을 리용하여 사쿠라공동법률사무소의 가와이변호사의 지도하에 NPO법인「중국귀국자・일중우호회」를 세웠고 이케다 스미에씨가 회장직을 맡게 되였다.

2009년에「잔류고아의 집」을 개설한 이래 귀국고아들의 심리상담, 잔류고아 2세 3세의 취직상담, 일본어교실, 탁구교실, 노래공부 등 여러가지 활동을 정기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하여 현재 관동지역의 383명의 회원들이 등록되여 있는 「잔류고아의 집」은 잔류고아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곳으로, 속마음을 나누고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동의‘집’으로 자리잡게 되였다. 2010년에는 60대와 70대의 잔류고아 40명의 힘으로「만두공방」을 오픈했다. 손으로 손수 빚은 만두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외계의 지원에만 의탁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자체의 힘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해가고 있다.

“잔류고아집”에 대한 요미우리신문의 보도기사
무료일본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잔류고아들

드디어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조금씩 적응을 하기 시작한 잔류일본인고아들이다. 중국에 버려 졌다가 조국이라고 찾아 돌아 온 그들에게 중국에 돌아가라고 찬 시선을 던졌던 사회가 따뜻한 눈길을 주기 시작하였는데 받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케다 스미에 회장을 비롯한 모든 잔류고아들의 마음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 났을 때이다. 큰 도움이 못 되더라도 재해민들에게 정신적인 안위를 줘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잔류고아들이 나섰다. 때는 지진이 발생한지 한달도 넘지 않은 상태라 전반 동일본지구가 사회적인 혼란상태에 처해 있었던 4월초였다. 대형뻐스 석대로 이와테현 리쿠젠 다카다(岩手県陸前高田)시에 찾아 간 그들은 현지에서 물만두 9000여개를 빚어 재난민들에게 대접했다. 밤길로 다시 도꾜에 돌아 오는 뻐스안에서 그들은 곤난한 시기에 도움을 받았던 자기들이 저그마한 힘이라도 보답할 수 있은 것으로해서 저마다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글 / 길림신문 일본특파원기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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