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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의 중국정 (1) by 길림신문 특파원기자 리홍매 / SHIMTO Media 2019.12.16

중국귀국자・일중우호회의 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 회장

쉼터편집의 말

우리 처럼 고향을 떠나 일본이라는 타향에서 삶을 개척하고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전쟁의 잔류고아로 중국에 남아서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며 삶을 체험해온 일본인들도 있답니다.

길림신문 특파원기자 리홍매 선생의 인터뷰기사로 함께 보는 일본잔류고아의 삶, 세번에 나누어 공유해드립니다.

인생이야기의 배경은 서로 다를수 있지만,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위해 열심히 부딛쳐가는 사람의 마음들은 공동함을 느낄수 있습니다. 남의 인생이야기 속에서, 내 삶에 도움되는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일전쟁에서의 항복을 선언하였다. 패전시 중국에 있었던 근 155만여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은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피난길에 태여난 아기들과 먼길을 이동할 수 없는 나이의 아이들을 살리려고 당지 고마운 중국인들에게 자식을 맡기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때 남겨진 아이들이 바로 오늘날의‘잔류일본인고아’들이다.

1972년 중일관계가 정상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였다. 1981년에 첫 잔류고아방일조사단이 륙친혈연조사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8년 12월 31일까지 무려 2만 907명의 잔류고아와 그 가족들이 일본에 영주귀국을 하였다.

일전에 도꾜에서 만난 현재 중국귀국자・일중우호회(中国帰国者・日中友好会)의 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 회장이 바로 그들중의 한사람이다.

하필이면 내가 왜 쑈르번꾸이즈 (小日本鬼子)일가.

1940년대말,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제일 번화한 유신(維新)시장부근에 부모님 사랑을 유난히 받고 자라는 서명(徐明)이라는 녀자아이가 있었다. 7살 나던 해에 소학교 1학년생이였던 서명은 학교친구들속에 끼워 영화관에서 항일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관람하게 되였다. 영화속 일본병사들의 만행을 보면서 어린 소명이가 분노의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뭔가가 날아 왔다. 웬 영문인지 뒤돌아 보는 순간 반급아이들이 서명이를 돌아가며 때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일본놈새끼…”

“쑈르번꾸이즈…”

선생님이 달려 와서 아이들을 말렸다. 선생님의 보호로 겨우 집에 돌아 온 서명이는 울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내가 왜 쑈르번꾸이즈예요?”

헌데 엄마는 놀라지도 않은채 그게 별명이라며 서명이를 두손으로 안아 주었다.

그날이후로 서명이는 웬지 자기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길이 예상치 않은 것 같아서 늘 불안했다. 그러던 1953년 서명이가 여덟살 나던 해에 공안국의 한 사람이 서명이네 집에 찾아 왔다. 

“당신 딸이 일본애 맞습니까? 일본사람을 돌려 보내야 한다는 정책이 나왔습니다.”

그때 서명이의 신상에 대해 입밖에 내지 않았던 엄마는 몇년이 지난 후에야 서명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그의 생모가 다섯 아이를 데리고 목단강에 있는 일본난민수류소에 피난을 가게 되였다. 피난길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안타까운 나머지 생모는 리씨성의 목수를 찾아 와서 무릎을 꿇은채 제발 아이를 살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후 리씨성의 목수는 당시 아이가 없었던 서명의 양부모에게 500대양(大洋:당시 류통되던 은화의 단위)을 받고 아기를 팔았다. 

서명이가 아홉살나던 해 양부의 사업실패로 집안생활이 일락천장이 되였다. 빚때문에 양부는 행방불명이 되였고 두 모녀는 그때까지 겪어 본적없는 생활난을 겪게 되였다. 생활난 뿐만 아니라 빚쟁이들의 시달림에 지칠대로 지친 엄마였지만 일자무식이였던 자기와는 다르게 서명이를 키우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서명이의 학교공부를 중단시킨적 없었던 엄마는 매일 서명이의 숙제가 끝나기를 기다려서야 잠자리에 들군 했다. 

그런 엄마의 정성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서명이였다. 어린시절 영화관에서 일본놈새끼로 몰리우는 자기를 감싸주던 선생님을 보면서 늘 교원의 꿈을 키워 왔던 서명이는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림림업국홍기림장 서남차 림장(西南岔林场)소학교에 배치받았고 그곳 림장의 한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 셋의 엄마로 되였다.

서명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늘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쑈르번꾸이즈”, 하필이면 내가 왜 일본사람 자식일가.

나는 누구일가

1972년 중일량국국교정상화가 실현되였다. 그 이듬해에 조직의 배려로 목단강시내에 전근하게 된 서명은 집 천정에 붙혀진 신문지에 박혀 있는 <중,일>이라는 두 글자에 자주 눈길이 가는걸 어쩔 수 없었다. 소학교때 남의 눈을 피하여 지구의우에서 가만히 찾아 보았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오래동안 원망하면서 살았던 친부모가 대체 어떤 사람이며 왜 자기를 버리고 갔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한편 양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 낳아준 부모를 찾아 온갖 고생을 겪으며 자기를 키워준 엄마에게 꼭 은공을 갚게 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엄마에게 솔직히 털어 놓았다. 엄마는 즉시 서명이를 이끌고 옛날 살던 동네에서 좀 떨어 진 리씨성의 목수집으로 찾아 갔다. 헌데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는 친부모를 찾을 만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았다. 

1980년 목단강을 방문한 한 일본기자가 서명의 사연을 기사로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혹카이도(北海道)의 요시가와(吉川)라는 한 로인으로부터 련락을 받게 되였다. 당시는 잔류일본인에 대한 조사가 다시 시작된 때여서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사이에 서신거래가 시작되였으며 최후 확인이 필요한 잔류고아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였다. 요시가와씨의 요청으로 서명이는 6개월간의 친척방문비자를 받고 1981년 7월 24일, 어린 세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향했다. 

혹카이도에 도착한후 친자확인수속을 밟는 과정에 확인증거가 부족하다고 여긴 일본정부는 DNA검정을 요구했다. 석달이 지난 후 친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검정서를 받은 요시가와씨의 태도는 일변했다. 일조에 서명이가 가짜증거를 만들어낸 사기군으로 되여 버렸다. 술에 절은 생활을 하기 시작한 요시가와씨가 매일 물건을 부쉬면서 그들을 내쫓았다. 기가 막혔다. 혼자 몸이라면 어디라도 갈수 있었지만 딸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중국에 돌아 가면 평생‘가짜일본고아의 자식’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 가야 할 세 아이의 장래가 걱정되였다.

우선 그집에서 나오기 위해 서명은 혹카이도법무부에 찾아 갔다. 헌데 중국법원에서 발급한 일본혈통고아증명서를 일본에서는 승인하지 않는다 것이였다. 친자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 강제송환되기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그들의 대답에 서명이는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헌데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궁리하던 끝에 일전에 친자확인 수속을 밟는 과정에 번역을 맡아주었던 번역사무소가 생각났다. 어렴풋이 들었던 빌딩이름 하나로 택시를 타고 번역사무소를 찾은 그는 결국 그분들의 도움으로 혹카이도중국령사관을 찾아 가게 되였고 자신의 처지를 알리게 되였다. 령사관에서는 요시가와씨에게 전화로 “서명은 아직 중국공민이다. 우리는 우리 공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서명이를 털끝 하나 다치기만 하면 우리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한달동안 거주할 수 있는 집도 마련해 주었다. 

혹카이도중국령사관일군들의 도움으로 1981년 12월 17일에 도꾜에 도착한 서명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하여 며칠동안 거리를 방황하였다. 

한해도 막가는 어느날 밤, 도꾜의 샨데리아 불빛아래에 안데르쎈 동화속의 성냥파는 소녀처럼 가냘픈 모습들이 비춰졌다. 아이 셋을 거느린 일본인잔류고아의 불쌍한 모습이 12월 22일의 아사히신문 기자의 사진보도로 전국에 알려 지게 되였다. 

“서명사건”은 일본을 들썽했다. 사쿠라공동법률사무소의 가와이히로유키(河合弘之)변호사가 서명을 돕겠다고 자원적으로 나섰다. 하여 1982년 6월 2일, 서명은 친부모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일본국적을 가진 첫 잔류고아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37년을 서명으로 살았던 그는 자기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번역일군의 성인 이마무라(今村)의 성을 따르고 양부모가 지어준 명(明)자를 남긴 이마무라 아키코(今村明子)로 호적을 올리게 되였다.

글 / 길림신문 일본특파원기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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