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44] 서울 블루스 by 박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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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장련, 음악편집 / 변소화

서울 블루스

글 / 박은자

2020년 9월13일에 우리 부부는 북경에서의 25년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왔다. 한달사이에 내린 갑작스런 결정이였다. 때는 한국에서 제1차 코로나 확산이 커지면서 하루에 수백명되는 확진자가 나온 시기였다. 매일 뉴스를 보면서 한달전에 유학을 떠난 딸애 걱정에 마음을 졸이다가 짐을 쌌다. 20대 풋풋한 시절에 만나 자수성가로 알뜰살뜰 꾸려온 보금자리를 떠나 하루아침에 트렁크에 입을 옷 몇견지와 각자의 노트북만 들고 떠났다. 그때 국내는 적시적인 방역과 거리두기로 일상을 회복하였고 비상시기 위험한 곳으로 가면서 어떤 미지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것만 같아 불안불안했다. 가슴이 큰 돌로 지지누르듯 무겁고 숨 막혀왔던 것은 이국생활의 녹녹치 않음을 알려주는 따끔한 예고였다.

우리가 입국한 날 딸애는 시누이네 집에 가서 신세를 지게 되였다. 당시의 방역요구에 따라 해외입국자는 14일간 격리해야 했다. 인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누이네가 맡아놓은 월세방으로 이동하였다. 기사석과 손님석 사이를 비닐로 막아놓고 마스크에 일회용 장갑을 착용한 기사 아저씨를 보면서 더럭 겁이 났다. 목적지에 도착해 기사 아저씨는 명함 한 장을 남기고 가면서 핵산검사를 받고 양성이 나오면 꼭 연락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가셨다.

새벽 다섯시에 북경에서 출발해 남경을 거쳐오고 공항에서 모바일 자가진단앱을 설치하다보니 월세방에 짐을 풀었을때는 밤 열한시가 넘은 늦은 밤이였다. 방 두개에 화장실과 주방이 달린 세 식구가 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빌라 2층이였다. 비상시기에 형제의 도움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움직이지 않고 살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무엇 보다도 딸애의 학교와 가까운데라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교차감염을 피해 이튿날 아침 우리는 걸어서 동네와 가까운 보건소에 가서 핵산검사를 마치고 아무데도 들리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음성이였지만 격리하는 14일간은 매일 아침 체온을 재고 모바일앱에 올리고 쓰레기도 버리면 안되였다. 밖을 나가지 못하기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수 없어서 냉동실에 얼려두고 감자와 고구마도 쪄서 껍질채로 먹었다. 운동량이 적어 하루에 두끼만 먹었더니 살이 많이 빠졌다. 격리기간에 방역당국에서 마스크와 체온계, 소독약, 의료품 분리봉투를 배달해주었다. 형제와 친구들도 먹을 것을 보내주고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힘든 격리시간을 거뜬히 이겨내고 형제들과 기쁜 상봉을 맞이하였다.

2주간의 격리가 끝나자 몇백명의 확진자로부터 50명이하로 줄어들었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막노동을 해서라도 딸애의 유학 뒤바라지를 한다고 결심했건만 정작 마주치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편은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리고 나는 코로나가 끝나면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추석연휴로 갑자기 확진자가 늘기 시작하더니 12월달이 되더니 하루에 천명을 넘나들었다. 3개월이 지나도 이력서는 한강에 돌 던진 격으로 감감무소식이고 45세이상 직원을 채용하는 회사가 없다며 남편은 노가다에 나가봐야겠다고 했다. 50대 중반이니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가 아니라도 취직하기 막막한 나이지만 그래도 남편의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 않아 모를 일이니 계속해서 보내보라고 했다.

배추 한 포기에 9천원씩 하고 쌀값도 국내의 다섯배나 되는 비싼 물가에 모든 것을 꼼꼼히 계산하면서 살아야 했다. 과일값도 엄청 비싸 제일 싸구려 바나나와 달걀만한 미니 오렌지 한개에 천원씩 하는 걸 가끔씩 사들였다. 그렇게 쪼개가면서 살림을 하느라 해도 점점 줄어드는 카드 잔고를 보면서 생활의 중압갑을 느끼게 되였다. 수입 한 푼 없이 쓰기만 하니 밑굽 빠진 항아리였다. 

결국 남편은 노가다에 뛰여들었다. 집세라도 벌어야 한다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어쩌다가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하는 서러움에 눈확이 젖어들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어서 남편을 보내놓고 알바천국, 벼룩시장에 들어가 보았다. 마음은 급한데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로 자영업자들의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기존의 직원들도 줄이는 판국에 햇내기를 쓰려고 하는 데는 한 곳도 없었다. 사는 동네에서 알바 채용공고를 보고 들어 가면 다들 무경험자라고 문전박대했다. 일자리 하나 구하기가 이렇게 험난하고 멀어보이기는 처음이였다.

그러는 나에게 남편은 잘 맞는 업주를 만나 일당도 넉넉히 받으니 비상시기에 잠자코 있으라고 위안을 한다.

그러던 어느날,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들어온 남편을 보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위험한 현장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그이가 짠하고 수시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가장이라는 이유로 혼자서 삶의 벼랑의 끝에 내몰려 외롭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많은 애로도 있었지만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성실성으로 우직하게 버텨온 가정적인 남편이다.

이른 새벽에 남편이 일을 나가면 인터넷을 뒤졌다. 하루에 올라오는 일자리는 서너개인데 보고 있는 사람은 수백명이였다. 막대한 경쟁자들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용기를 내여 한 번, 두 번 계속 노크를 했더니 드디여 가게로 와보시라는 문자를 받았다. 홍콩반점 야간 알바자리였다. 사장님은 식당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데 4일간 먼저 해보는게 어떻겠는가고 물었다.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할 일은 홀 서빙이였다. 손님들이 주문을 하면 물과 춘장, 양파를 세팅하고 음식이 나오면 테이블에 가져다주고 식사가 끝나면 빈 그릇을 주방에 날라다 주고 다시 새로 올 손님을 위해 깨끗이 닦아놓으라고 한다. 손님상이 나지면 그릇을 한 번에 다 날라야 한다고 시범동작을 보여주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 몇 번 지적을 받았다. 눈치를 봐가며 하는데 자정이 넘도록 홀에는 손님이 끊기지 않아 고개를 들새도 없었다. 용케도 네시간 정도 했는데 이튿날 아침 아홉시까지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해감해났다. 주문이 뜸해지자 같이 일하는 언니가 한쪽으로 부르더니 채용되려면 손님이 들어오고 나갈 때 큰소리로 인사를 하라고 슬쩍 귀띔을 해준다. 새벽 한시부터 세시까지 주문이 적어 그 사이 밥을 먹고 걸상에서 순번으로 쪽잠을 자니 첫날이여서 나보고 먼저 쉬라고 병풍으로 한 테이블을 막아주었다. 배려심에 고마웠다.

몸은 걸상에 누웠으나 끊임없는 주문과 바삐 돌아치는 언니를 보면서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아 다시 나왔더니 쉴 때 쉬여야 한다고 다시 들여보냈다. 코로나로 매상이 삼분의 일도 안된다는데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면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엄습해 웅크린채로 고개를 감싸 안았다. 눈을 부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있다가 교대로 나와 바닥을 쓸고 물걸레질을 하고 양념통을 하나하나 닦고 리필하고 냅킨을 넣었다. 다른 건 힘든대로 이겨낼만했는데 인사는 목구멍에서 맴돌뿐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벽 일찍 사장님이 나오시자 언니가 다시 의미의 윙크를 해왔다. 첫날부터 허리가 휠 지경이였다. 그 힘든 와중에 눈앞에는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른다. 수자, 춘자, 선옥이…벌써 서울생활 수년차인 친구들이 그렇게 대단해보일 수가 없었다. 체구가 나보다 작고 힘 나올데도 없어보이는 그녀들은 힘든 식당일을 해서 국내에 집을 사고 애들 뒤바라지를 해왔다.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허우대만 컸지 나약했다. 같이 일하는 언니가 앞뒤로 많이 봐주고 좋은 말을 해준 덕분에 사장님은 계속 쭈욱 나와달라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계약을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체력노동을 해본적이 없는터라 첫 날부터 여기저기 근육이 놀랐는지 적신호를 보내오더니 끝내는 드러누웠다.

어영부영 보내다가 원기를 회복하자 또 다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였지만 경력자로 되였으니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이번에는 삼계탕집이였다. 주방 설거지를 하라고 하였다. 주방실장이 시범을 보여주고 해야 할 일을 교대하고 각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직장인들이 들이닥치며 금새 크지 않은 홀에 손님으로 가득찼다. 물 한모금 마실 틈도 없이 그릇이 나오는대로 기계처럼 움직이였는데 미처 다 하지 못해 홀 언니가 들어와서 도와주었다. 점심시간이 지난지 한참 되였는데도 손님이 줄어들지 않았다. 무거운 뚝배기를 몇 백개 설거지하고 나니 팔목이 나갈 것만 같았다. 밥을 먹고 한 숨 돌리고 있는데 사장님이 조용히 불렀다. 봉투를 건네주면서 다른 데로 가보라고 한다. 하루도 안돼 짤렸다.

패전병이 되여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도로 옆의 벗꽃은 언제시린 겨울이 있었냐는 듯이 앞다투어 피여 분홍빛 뭉게구름을 연출했다.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들속에서 그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데 나만이 오갈데 없는 것 같아 왈칵 눈물이 났다. 꽃샘 추위에 옷깃을 여미며 혹여 남들이 볼가봐 얼굴을 수그린채 땅만 보고 걸었다.

집에 들어서니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귀가하여 웃음 띤 얼굴이다. 면접을 가야하니 옷들을 준비하라고 한다. 이력서를 뿌린지 반년만에 남편은 무역회사에 중국업무담당으로 취직이 되였다. 20여년간 무역회사 운영경험과 그의 전공이 나이를 떠나 효력을 발한 것이다.

코로나로 딸애는 두문불출하고 온라인 수업을 받았다. 다양한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한창 친구들을 만나야 할 나이에 비좁은 집안에 갇혀만 있었다. 딸애는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도움을 청했다. 꿈을 가지고 한국유학을 선택하면서 토픽6급을 따냈지만 막히는데가 많았다. 북경에서 태여나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말 학교 문전에도 못 가봤으니 우리말 실력은 젬병인셈이다.

취업을 뒤로 하고 딸애와 수업을 듣기로 했다. 같이 듣고 요점을 정리하면서 딸애가 다시 소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온라인 수업의 장점은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하는 딸애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딕톡 편집을 하고 독서를 하면서 서로 다독이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변변치 못한 에미지만 전전근근 모든 힘을 달달 글어모아 딸에게 무엇이라도 보탬이 되고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기대여오는 딸애가 있어서 정신줄을 하루라도 놓을 수 없다.

금방이면 사라질거라고 믿었던 코로나는 좀처럼 줄어들줄 모르더니 올해 3월달에는 하루 확진자가 60만명까지 나왔다. 백신접종을 3차까지 하고 외식을 피하며 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목이 불편하다고 한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남편은 독방을 쓰고 나는 주방에서 잤다. 회사동료가 확진을 받으면서 줄줄이 다 감염되였다. 멀게만 느껴지던 코로나가 눈앞까지 오자 긴장했다. 한 집에서 세 식구가 살면서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밥을 해서 방앞에 놓고 나와 딸애가 밖에 나가면 들여가서 먹고 더운 물로 그릇을 소독하고 화장실에 소독수를 뿌리고 창문을 열고 집에서도 마스크를 24시간 착용해야 했다. 그렇게 조심하느라 했건만 3일째부터 목이 간질간질해나며 잔기침이 났다. 오미크론 잠복기가 3일정도라고 하더니 딱 그대로 걸려들었다. 저녁부터 열이 나더니 밤새 고열로 삭신이 쑤시며 잠들 수가 없었다. 요행을 바랐는데 결국 나도 피해가지 못하고 3월 29일에 확진 받았다. 같은 양성이었지만 증상은 많이 달랐다. 남편보다 내가 반응이 더 심했다.

딸애가 걱정되여 친척집에 피난을 보내고 싶었지만 양심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우리부부가 재택치료하는 동안 딸애가 가사를 도맡았다. 의료기관에서 배송해준 처방약을 먹고 남편은 이틀만에 나았고 나도 닷새가 되여 나았다.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던 코로나가 완치되자 별거 아니였다. 일반 몸살감기와 같았다. 그러나 뉴스에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후에도 또 걸릴 수 있다니 조심할 수 밖에. 다행히 고마운건 딸애는 피해갔다.

소뿔도 꼬부라든다는 무더운 삼복철은 고역이였다. 샤워를 해도 온몸이 찐득찐득하고 땀방울을 뚝뚝 흘렸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땀을 흘려본적이 없었다.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방의 상태가 예상외로 열악했다. 연일 며칠 오는 비에 벽지를 뚫고 곰팡이가 끼고 집안의 온도는 37.9도까지 올라가고 습기가 차 숨막혀왔다. 벽에 못질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집주인을 잘못 만나 울며겨자먹기로 찜통더위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집이 남편이 다니는 회사랑 멀어 한 시간 넘는 출근길을 감내해야 했고 집의 상태가 좋지 않아 주인과의 마찰로 번거로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래도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사는 건대입구역이여서 문밖을 나서면 양꼬치거리가 있고 순희냉면을 한 그릇 시원하게 먹은 날에는 삼복더위도 납짝 엎드리게 하고 중국음식을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는 동네여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임대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우리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섰다. 네이버에 들어가 부동산이 올려놓은 매물을 여러개 보고 발품을 팔아서라도 이번에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집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보증금과 월세가 2년전보다 많이 올라 내 돈내고 집 찾기도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주말마다 남편과 많은 집들을 보았지만 들어가 살고 싶은 집이 없었다. 싼게 비지떡이라고 보증금과 월세값을 더 올렸더니 부동산에서 괜찮은 매물들을 보여줬다.  

부동산 사장님의 소개로 강동역에 있는 집을 계약하였다. 원래 살던 집보다 너르고 채광도 좋고 무엇보다 친절하고 인정이 있는 주인 할머니가 고마웠다. 새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한테 깨끗한 집에서 살게 하고 싶다며 우리를 위해 특별히 벽지를 도배해주고 에어콘도 설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과의 회사와도 15분거리여서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 우리집이라도 되는 양 거금을 들여 새 가구와 가전제품을 주문하고 그릇도 새것으로 다 바꾸었다. 꾸며놓으니 신혼집 같았다. 작지만 아담한 집, 좋은 일이 많이 생길거라는 기대감으로 마냥 행복하다.

돌이켜보면 열악하고 힘든 2년이였지만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이 버텨낼 수 있는 동력이 되였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많은 성장을 가져왔다. 남편은 승진되였고 딸애는 학기마다 장학금을 타고 지난 18일에 우수 졸업생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나도 글쓰기를 견지하면서 여러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그 중 한편은 상까지 받아안았다. 고생도 하고 시련도 있었지만 힘든 순간을 잘 버텨내고 우리 가족에게 감동으로 남았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이국땅에서 가족이 함께 한 솥밥을 먹는 것에 감사하고 살아서 숨 쉴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냥 지금이 좋다. 웃으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뿐이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희망을 품고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밝은 아침을 열어간다.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 사장
17.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8.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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