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25] 나와 천사들 by 허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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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 윤련순, 음악편집 / 변소화

나와 천사들

글 / 허순애

봄이 왔다. 만물이 소생하는, 예쁜 꽃들이 만발하는 봄이 왔다. 코로나가 3년째 대유행을 하고 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누구든지 흑룡강성 목단강시 서목단가로 오면 나의 영업 가게에 걸려져 있는 “영순한복&이벤트전문” “무형문화재” 란 멋진 간판을 한 눈에 볼수 있다. 

그렇다. 시간의 흐름은 너무 빨라 어느덧 이 간판을 위하여 내가 희노애락, 고진감래 정신으로 달려 온 세월도 40여년이 된다. 휠체어 신세로 년륜과 함께 모진 풍랑속에서 나의 자그마한 꿈을  향해 쉬임없이 거첨없이 달려왔다는 이 한가지만으로 가슴 뿌듯하며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사에 감탄이 절로 난다.

나는 1963년 녕안시 편벽한 산골에서 소학교 교원인 아버니와 마을의 위생소에서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3녀 1남중의 복딸로 축복을 받으며 태여났다. 얼굴 피부가 뽀얗고 오관이 단정한 나는 천사가 태여 났다는 말을 들었고 그 보다 총명 령리하여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그런데 내가 재롱을 부리며 한창 말 마디를 배우려는 찰나 출생 11개월만에 그만 “척수희백질염” 민간에서는 (소아마비증)이라는 병에 걸렸다. 그 후유증으로 두 다리 모두 불구가 되였다는 청천병력이 떨어졌다!

“두 다리를 전혀 못 쓴다구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내 딸이 이런 진단을 받다니, 부모님들은 이 말을 믿을수 없었고 잔혹한 현실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수 없었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혹시나 해서 농촌에 뻐스도 없지만 나를 업고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 한살 두살 키는 커가지만 희망은 날이 갈수록 묘연하기만 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여 창밖으로 책가방을 메고 즐겁게 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들을 보니 너무나 부러웠다. 그런 나를 측은히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너무 어렵지만 그래도 학교에 다녀야 한다면서 고무 격려를 해주셨다. 그리하여 동년배들보다 일년 늦게 어르신들의 등에 업혀서 학료에 다니게 되였다.

이렇게 소학교는 할머니, 아버지와 선생님들의 등에 업히여 다녔지만 초중은 그럴수 없었다. 공부 성적은 최우등생이였지만 신체 조건으로 초중 진학은 포기하고 독학으로 초, 고중 과목을 다 완성했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다보니 정상적인 학교 진도에 따라서 공부를 했고 시험칠때면 아버지께서 시험지를 가져다 주어 시험을 치르군 했다.

자습으로 초, 고중 문화과를 공부하면서 나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바느질에 흥취를 가졌다.우리 할머니는 솜씨가 뛰여나신 분이셔서 재봉틀도 없는 그때에 손 바느질로 한복도 지으시고 보통 옷도 만들어서 우리들에게 입히시였다. 바느질을 얼마나 꼼꼼히 하셨는지 재봉틀 못지 않아 동네방네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워낙 공부도 잘 했고 눈썰미도 뛰여난다고 늘 칭찬을 받아온 나는 할머니의 바느질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고중학과 공부를 하면서 일찍이 철이 든 나는 앞으로 나의 전도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워낙 책 읽기를 좋아했던 탓으로 문학을 전공할까, 또 한때는 의학을 전공하여 나와 같이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고쳐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의학서적도 탐독하고 침구도 배워서 자기 다리에 침구를 하면서 무척이나 노력했지만 할머니 재간에 반해 바느질로 마음을 굳혀갔다.

그와  마침 우리 집이 이사를 하게 되였는데 집 바로 동쪽에 개인 양복점이 있었다. 나는 학교는 못 가고 문화공부를 하고 난 후에 그 양복점에 가서 놀면서 그 재봉사가 일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일도 거들어드렸다.

“옷 깃을 스쳐도 인연” 이라고 아마 이런 인연도 흔치 않은것 같다. 난 처음에 심심풀이로 다녔는데 그러지 않아도 할머니의 영향에 이미 물젖은 나는 그만 홀딱 반해버렸다. 하여 갈적마다 나도 해보았으면 하는 어떨궁이 나를 유혹하여 견딜수가 없었다.

“흥취는 선생”이고 “세상의 어떤 일도 남이 시켜서는 못한다” 는 이 말이 천만지당하다. 누가 시켜서는 그렇게 못한다. 난 마치 그 양복아줌마가 부르는듯이 짬만 있으면 가고 싶고 가면 뭐나 알고 싶어 어깨 너머로 눈에 익히기 시작하였다. 그 아주머니께서도 열심히 배우려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셔서 여러모로 잘 가르쳐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계몽선생이셨던 그 분이 너무 감사하다. 그 아줌마가 잘 가르쳐주고 또 할머니의 솜씨를 타고 났는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식구들의 간단한 옷을 지을수 있었고 평가도 괜찮았다.

하루 이틀, 한번두번 난 나의 바느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자신심이 커졌다. 그 것은 또한 인간은 태여나면 제일 먼저 뭘 걸쳐야 하는 존재이니 복장을 전공하면 더욱 빨리 성공할수 있겠다는 스토리가 나의 뇌를 쳤던 것이다.

근데 난 또 망설이였다. 자신이 혼자 설수도 없는 두 다리를 보니 가슴이 미여 터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지 다리 치료는 꼭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난 부모님들과 나의 생각을 말했더니 인츰 미리 알아두었던 길림성 길림시 육군222병원과 연계를 취하여 두차례에 걸친 다리교정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은 성공했지만 약 2년간의 재활치료는 너무 힘들었다. 재활치료사 선생님들이 한번씩 다리를 폈다 당겼다 할 때마다 진짜 이를 깨물고 참는데 온몸에 땀이 철철 흘렀다. 그래도 난 한번도 선생님들하고 훈련강도를 낮추어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내가 하도 악을 쓰고 참고 견디여 내니 치료사 선생님들도 대단하다면서 엄지척을 들었다. 2년후인 18세에 드디여 쌍지팽이를 짚고 일어설 수 있었다. 비록 근본적으로 보행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였지만 지팽이에 의지해서 몇 걸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큰 기적이였다.

전혀 설 수 없다던 다리가 지팽이라도 짚고 일어섰으니 이젠 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야 했다. 즉 재봉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했다. 난 휠체어와 쌍지팽이를 준비하여 북경 모 복장학원으로 갔다.

복장학원은 말 그대로 전국 각지에서 온 좀 한다하는 젊은이들로 모였는데 한반에 몇십명이 되는 학생 중 나만 유독 휠체어를 탔고 나 혼자 조선족이였다. 다리가 불편하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조선족 동네에서 태여나 자란 나였기에 언제 한족들과 어울릴 조건이 안되여 한어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은 불보듯 뻔했다. 선생님 강의하는 그대로 필기가 어려웠고 친구들 사이에 소통도 막히는 데가 많았다. 그래도 나는 참을건 참고 극복할만한 것은 극력 참아야 했다. 그 중에는 내가 휠체어 탄다구 좀 이상한 눈길을 주는 친구도 있었다.

허나 나는 이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배워야 할 재봉기술 공부에만 몰두했다. 친구를 통해 신화자전을 사다가 매일 같이 자전을 뒤져보며 열심히 한어공부를 했다. 낮에 강의를 들으며 적을 수 없는 글자는 따로 표시해두었다가 저녁이면 꼭 알아내고야 말았다. 뭐던지 하면서 배운다고 난 매일 같이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후날 학원같은거 꾸리면 어떨까하는 욕심이 생겼다.

나는 이런 희망을 품고 더 열심히 필기를 하였고 선생님의 강의수준을 많이 익혔다.기회가 좋아 유명하신 이화숙 디자이너 선생님의 가르치심도 잘 받았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간고한 학습생활 3년후 두가지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재봉기술 자격증과 앞으로 학원에 사용할 강의 재료로도 비슷하게 준비가 된 것이다. 

간고한 학습이 끝난 후 나는 친구와 같이 할빈 대도시에 가서 홀로 서기 복장가게를 꾸렸다. 나 혼자만의 실력이 과시되는 첫 걸음이다. 비록 낯 설고 물선 땅이라 첫 스타트가 힘들었지만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내였다. 견지하는 것만이 승리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해나갔다.

할빈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후 북경에서 학습할 때 부터 품었던 타산을 실현해보려고 1990년에 목단강시의 조선족 집거구인 도시 서쪽에 간판을 걸고 한쪽으로 영업하는 동시에 봉제기술학원을 꾸렸다. 과연 북경에서 필기한 봉제기술에 관한 필기장이 효력을 냈다. 학원을 개업해서 강의 실력이 소문나 학생이 최고로 80명까지 되였고 영업 면적은 150평으로 확장되였다.

게으른 사람앞에는 모두가 산이고 부지런한 사람앞에는 모두가 길이라고 솔직히 내가 혼자 힘으로 학생(한족포함)들의 참된 강사가 된다는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였다. 영업에 신경 써야지 강의에 몰두해야지 어떤 날에는 목이 아파 말소리가 다 가라앉을 때도 있었다. 심지어 삼시 세끼 편히 밥상에 앉아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다년간의 꾸준한 노력과 열심히 뛰여 다닌 결과 나의 “영순복장” “영순복장학원” 은 지명도가 높아지고 매일 찾아오는 손님과 학생들로 북적이였다. 나 홀로서기의 창업의 길이 자리잡혔다…

음악에도 고저 장단이 있고 길도 올리막과 내리막이 있듯이 모든 사물도 그 변화와굴곡이 크다. 내가 봉제일을 시작하여 호황을 누릴 즈음에 중국의 기성복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봉제일에 한계를 느끼게 되였다. 형세가 나날이 나빠지고 있는 추세였었다. 어떡하지?

난 또 갈림 길에 섰다. 종로로 갈까? 영등포로 갈까? 종일 고민에 쌓여 밤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고 어렵게 시작한 창업의 모든 것이 아까웠다. 거기에다 나의 신체상황도 고려해야지, 똑딱똑딱 애매한 시간만 흐른다. 모순속에서 별의별 궁리를 다 하던중 1992년 중한수교 후 점차적으로 조선족들이 한국 나들이가 유행되면서 나에게 명확한 계발을 제시해 주었다.

기회는 항상 준비되여 있는 사람에게 온다고 나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난 목단강시와 린근 현성에 20여만명이 넘는 조선족 인구가 집거하고 있는데 한복집이 없다는 점을 보아냈다. “영순복장”을 “영순한복”으로 바꿀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것은 노력과 분투보다도 정확한 결책을 내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맞는 말이다.

나는 새로운 도전에 발을 내 디뎠다. 결정했으면 해야 하고 또 잘 해야 한다. 우선 시장조사를 하고 불편한 몸으로 가지가지 곤난을 극복하면서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왔다. 오직 나의 머리에는 최고의 한복을 만들기 위한 이 것밖에 없었다. 남들이 한번 가면 될 일을 두번 세번 다니면서 분망히 돌아쳤다. 결국 끝내 한국의 제일 유명한 한복회사와 손잡고 본격적으로 한복집을 만들었다.

허나 아무리 내가 봉제기술이 있어 같은 바느질이라지만 기성복과 한복은 다른점이 많았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발자욱은 떼였지만 쉬운 일이 아니였다. 특히 보통 옷을 만드는 곳이라고 소문난 가게를 한복집으로 바꾸다보니 손님들에게 적잖은 불편을 주는 동시에 한복 만드시는 분들은 편리하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게는 점점 한복집으로 이미지가 바뀌였고 예쁜 한복을 입으면서 손님들은 한국에서 해 입고 온 한복보다 더 예쁘고 특히 가격이 좋다고 높은 평가를 해주었다.

얼마후 또 새로운 아이템을 발견했다. 손님들이 이쁜 한복을 맞춘 후에 행사를 하려니 넘 힘들다구 했다. 알고보니 조선민족행사 즉 결혼잔치,칠순잔치, 돌잔치 등을 대행해줄 이벤트 사업체가 없는 것이였다. 아, 그래…. 난 여직 이걸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나무람하면서 “영순이벤트대행센터”를 만들기로 했다.

무엇이나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난 이 항목을 선정하면서 역시 잘 되기를 기원하면서 정성껏 준비하여 선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희소식이였다. 우선 손님들이 너무 편리하다고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잔치 큰 상이랑 사회자, 가수, 사진, 녹상 등등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더니 너무 편하게 잔치를 할 수 있다면서 좋아하셨다. 한차례 두차례 행사를 진행하니 손님들이 보고 듣고 많이 찾아오셨다. 손님들의 불편을 덜어드리고 수요에 만족을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거기에 또한 무궁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3년째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가 가게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많은 행사가 취소되고 손님이 많이 줄었다. 새로운 시련이 온 것이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여 정상적인 영업이 진행되였으면 좋겠다.

후에 개발하게 된 상제한복과 상제용품(丧服)도 역시 좋은 아이템으로 평가가 높았다. 한복으로 상제용 옷을 해달라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시작했는데 나중엔 완전히 단독 항목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들이 상제옷과 상제용품에 대해서 잘 몰라서 집안에 일이 나지면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한국의 유관부문과 연계하여 18여가지에 이르는 품목에 대한 설명과 사용방법과 절차를 프린트해서 넣어드리고 필요한 모든 것을 한가지도 빠짐없이 준비해드려서 편해하셨다. 시대의 발전에 발 맞추어 인터넷 매장도 신설하고 핸드폰으로 워이씬과 더우인과 콰이서우 등등도 활용하고 있다. 연해도시와 외국에서도 주문을 받군 한다..

 “정성이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 고 한복을 만져도 못 보았던 내가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열심히 노력한 결과 한복이 빛을 바랬다..

날이 갈수록 고객과 정부의 긍정을 받았는바 2014년 12월에 중공 목단강 시위, 목단강 공상업 연합회, 목단강시 민족종교사무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영순한복과 영순이벤트를 “소수민족영세기업창업선봉”이라는 빛나는 영예를 주었다. 2015년 6월에는 목단강시 정부에서 반포하고 목단강시 문화국에서 수여한 무형문화재에 “한복제작” “조선족 돌잡이” 두 항목이 입선되였다.

가게의 지속적인 발전과 동시에 2006년에 지인의 소개로 샬롬장애인협회를 알게 되였고 박모세회장님을 알게 되였다. 뜻밖의 교통사고로 두 딸을 하늘나라에 보내고 지체장애1급 판정을 받은 안해와 함께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장애인돕기 일을 하시는 그분한테서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시였다. 그 분들은 장애인을 천사라고, 날개를 상한 천사라고 했다. 후에 10여년동안 목단강에 있는 장애인들을 후원해 주었는데 약 600여만원에 달하는 장애인용품을 보내주었다. 너무 감사했다. 

내가 목단강시 지체장애인협회 주석을 연임한지도 장장 15년 세월이 흘렀다. 목단강지구에는 약 16여만명의 장애인들이 살고 있다. 이 사업을 한복업과 병행하면서 나는 사회의 최하층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중증 장애인들을 섬기게 되였다. 대부분 2-30대의 뇌선마비장애인들인데 엄중한 이들은 사지마비로 식사도 자기절로 할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중증 장애인들에게 바깥 출입은 평생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나는 이들을 위해 해다마 장애인 날 ,국제 장애인 날, 국경절, 추석, 구정 등 명절이면 가게 임원들을 파견하여 명절 위문금과 위문품들을 전해주고 따뜻한 명절인사도 전했다. 

날씨가 따뜻한 5월의 장애인 날에는 경치 좋은 곳에서 장애인 야유회도 조직하군 했다. 중증 장애인들을 한번씩 움직이려면 많은 인력과 물력과 차량이 동원되여야 한다. 사람은 다 감정의 동물이라 그 가족들은 자기네는 엄두도 못 내는 바깥출입을 시켜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감사의 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단다. 그런가 하면 장애인 본인들은 며칠전부터 흥분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단다. 후에는 활동을 조직할 때마다 일찍이 알려줄 수가 없었다. 그 것은 그네들이 흥분되여 잠을 설칠까봐서이다. 

내가 장애인협회 주석을 맡아하면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몰라도 된다”는 신조로 오직 자원봉사의 차원에서  많은 천사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추진해 나갔더니 여러 사회자원봉사단체에서 같이 좋을 일을 하자구 찾아와 주었다. 너무 감사하다. 

중증 장애인들, 우리 천사들은 비록 많이 불편하지만 엄청 총명하다. 장애로 학교문앞에도 못 가봤지만 컴퓨터와 핸드폰을 능란하게 다루고 또 그것들을 통하여 외계와 소통할수 있다 . 현재 우리 천사들 워이씬 그룹이 3팀으로 몇 백명이 있는데 어떤이들은 엄지발가락 하나 혹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는데두 그렇게 능란하게 핸드폰을 다룬다. 핸드폰으로 세계의 지식,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알아간다.  

인류 발전사에 6%의 장애인을 배출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렇게 힘들고 고달픈 장애인협회일을 보고 있지만 매번 그 천사들에게서 친절하게 “허엄마, 허언니, 허누나, 보고 싶어요” 라는 친절한 말을 들을 때마다 다시 한번 페부로부터 솟아나는 정다움과 이 일에 대한 중요성과 절박함을 느끼며 그들이 진심으로 “허엄마는 우리 엄마보다 낫다”는 말과 함께 어떻게 하면 그 천사들을 위하여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장애인활동이 있을 때면 소학교에 다니는 꼬마 친구들도 동행하여 이런 중증 장애인들을 보면서 또 다른 교욱이 될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또 다른 각도에서 어린이 교육에 큰 도움이 된다구 가장들이 좋아했다. 

중증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정부의 중시와 배려, 긍정도 많이 받았다. 목단강에서 열리는 여러 차례의 장애인 대표대회에 참석했고 2012년에는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 장애인사업 표창대회에서 선진 공작자로 선거되였고 2018년에는 흑룡강성장애인연합회 제7차 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장애인 사업 추진을 위하여 계획들을 함께 연구하였다. 

요즘 코로나가 심해서 천사들의 활동을 인터넷으로 진행하고 있다. 글짓기, 사진촬영 등 다양한 문화오락프로를 진행하고 있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사라져 우리 천사들이 자연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같은 조건에 같은 직업을 가진 좋은 남편을 만나 건강한 아들을 보고 또 우수한 대학생으로 잘 키워 모 회사에서 중견인문로 활약하고 있으며 손주도 안겨주어 나를 할머니로 승진시켜 준 행복한 가족이 있다. 하여 가족에서나 동료들이 내가 너무 힘들어 한다고 쉴 때가 되였다고 좋은 권고도 하지만 나의 대답은 아니다. 나의 마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평생 우리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위한 사업에 깊숙이 몸을 담아 온 나는 앞으로도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위하여 계속 노력을 아끼지 않을거구 특히 우리 귀여운 천사들을 위하여 뭔가 계속 해야하겠다는 생각에 멈출수가 없다.  앞으로 또  좋은 분들과 손잡고 우리 천사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해야겠다는 굳은 의지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던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허리 굽혀 감사인사를 드린다. 여러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아래 내용을 클릭하시면, 협찬기업 리스트, 협찬개인 리스트, 협력단체 등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크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4.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5.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8.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19.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0.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7.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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