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눔과 베품의 신조 한결같이 지켜온 재미 조선족 ‘친선대사’ 박영애 원장

글 / 이화옥 본지 미국특파기자
편집 / 배상봉

출처 / 동북아신문

편집자의 말

본문을 동북아신문 이동렬 대표님의 추천으로 일본 쉼터미디어에도 싣게 되었습니다.

글로벌 조선족시대를 열어가는 1세로서 미국 현지에서 든든하게 자리를 잡고, 고향을 위하여 그리고 현지의 조선족들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는 박영애 원장님의 떳떳한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인터뷰 중 국제적인 협력을 위하여 활약하는 중 일본의 조선족과도 관련이 있었던 부분이 우리 일본에 있는 조선족들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멋있고 상세한 인터뷰를 정리해주신 이화옥 동북아신문 미국특파원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또 모처럼 이 글을 읽어주시는 조선족 독자분들에게도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 – 배상봉

시작하는 글

글로벌시대의 물결을 타고20세기 후반기부터 시작되었던 중국 조선족들의 미국 이민역사도 어느덧 40년 세월이 흘렀다.

재미 조선족 ‘친선대사’, 연변중의원 박영애 원장

이 격변기에 미국에 이민 와서 연변 중의학을 전파하며 조선족동포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고 고향 연변에 교육 기부금을 전달해준 베품의 ‘친선대사’가 있다.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사는 연변중의원 원장이며 연변대학 명예교수인 박영애 여사이다.

2016년에 기자는 박영애 원장을 취재한적이 있지만, 워낙에 마음이 따뜻하시고 훌륭하신 분이라 그후의 그의 삶의 스토리가 늘 궁금해 있었다. 마침 지난 4월 뉴욕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 그를 다시 찾아 뵙게 됐다.

박원장은 그동안  신문, 잡지, 인터넷을 통하여 미국 동부 조선족동포사회와 한인사회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 민족사랑과 고향사랑을 실천하는 백의천사로 덕망이 높아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워킹 맘으로, 또 정열적인 사회봉사자로, 미국에서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워낸 조선족 이민 1세대의 훌륭한 본보기로, 그의 미담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미국 동부 여러 잡지들에 소개된 박원장의 사적

올해는 그동안 나눔과 베품의 신조를 한결같이 지켜온 박원장의 미국이민 생활 34년째 나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 기자는 이국 타향에서 남달리 보람차고 의미 깊었던 그의 삶의 여정을 더듬어 보고자 인터뷰를 했다.  

젊었을 때 고생 즐겁게 사서하다

박원장의 고향은 길림성 공주령시이다. 그는 1954년에 부모가 모두 군인 의사인 유복한 가정의 2남1녀중 맏딸로 태어났다. 

길림성 교하시 중의학교를 나온 그의 의사 생애는 19살 ‘맨발의사’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70년대 편벽한 시골의 열악한 의료환경에서 그는 직접 약재를 재배하거나 산을 타고 다니면서 약초를 캐다가 그 중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해내는 고생을 사서 하면서도 그 약들로 환자들을 치료해 주며 효험을 보는 과정을 즐겼다.

1984년에 그는 연길시 방직공장 직공병원 오관과 의사로 근무했는데 하루에 환자 몇 명 오지 않았다. 편안하고 한가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매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에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낀 나머지 병원 지도부에 자진 신청하여 광주 등 외지에 가서 연수를 받기도 하고 치료 항목도 늘리고자 무척 애썼다.

병원에서 이온침투법으로 청소년들의 근시를 치료

그러던 중 그는 ‘중초약 이온침투(中草药离子透入) 청소년 근시예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의 방학동안을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치료하여 주었는데, 그 효과가 좋아서 병원의 수입도 함께 올려 주었다. 그 당시만 하여도 방직공장 병원의 의사 월급이 32원일때 그는 개인진료소의 순수입만 매달 천원이상을 올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원호(萬元戶)”가 되었는데 돈 보다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열심히,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그 자체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해에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 오기 바쁘게 그는 상급의 동의를 거쳐 연변에서 최초로 과감하게 “성형미용 클리닉” 개인 진료소를 세우고 퇴근 후에 운영하면서 낮에는 방직공장 병원의 의사도 겸해 병행하였다.

박원장은 “아직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 큰 가마밥을 먹는 편안함 보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젊었을 때 고생을 돈 벌면서 즐겁게 찾아 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감개무량해 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박영애가 있게 된 것은 사랑하는 고향이 있고, 그 고향에서부터 지켜온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거움을 찾자’는 좌우명이 있었기에 때문이지요.” 

이런 남다른 경력과  삶의 좌우명, 창의적인 사고방식과 대담한 추진력 등은 그가 1990년에 유학생 남편을 따라 낯설고 물 설은 미국 땅에 와서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놀랍게도 8개월만에 연변중의원(일명 연변한의원) 개업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되었다.  

펜 주 중국조선족 동포협회 창립… “우리들의 친정”, “조선족들의 대모” 탄생

박원장은 연변한의원을 운영하면서 생활형편이 어려운 유학생들이나 신분문제로 의료보험이 없어 힘들어 하는 조선족 환자들을 보면 측은지심이 일어 내 가족같이 따뜻하게 대하며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또 설날 같은 큰 명절에는  필라델피아, 뉴욕, 워싱턴 등 인근 각지 조선족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의 고달픈 마음을 헤아려 큰 잔치를 베풀어 주고  향수를 달래주며 서로 회포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이국 타향에서 “조선족들의 친목 도모 뿐만 아니라 위상 제고나 근본적 권익수호를 위하여, 또한 조선족 커뮤니티의 자립적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단체를 무어 협력해야 할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펜 주 중국 조선족동포협회 창립식, 동포회관 앞에서( 박원장이 내놓은 개인 건물)

2006년 3월 12일에 그는 드디어 “펜실베이니아주 중국조선족동포협회”(이하 펜 협회) 를 창립하였다.

펜 협회 초대회장이라는 무겁고도 책임감 있는 중임을 어깨에 짊어진 그는 5000달러를 선뜻 협회에 희사하였고, 또 필라델피아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인 5번가에 있는 자신의 건물 1층을 흔쾌히 동포회관으로 내놓았다.  

당해 5월 28일에  ‘펜 주 중국조선족동포협회 창립대회’ 및 “제1차 펜 주 조선족동포 운동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연변의 유명 가수 윤행성, 김영일 선생님과 무용가 전춘옥 선생님을 특별 초청하여 행사의 빛을 더했고 남여 배구경기, 줄 당기기, 남여 혼합기래 등 다양한 경기 종목을 넣어 대회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날, 필라델피아의 중국 커뮤니티, 한인 커뮤니티, 여러 교회들 뿐만 아니라 뉴욕 전미조선족협회 및 델라웨어 주, 버지니아 주 등 각지에서 도합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 성회는 친선을 도모하고 단합과 화합을 다지는 미  펜 주 이민사의 새로운 한페이지를 시작하였다.  

 펜 협회 창립대회 밎 체육대회
초창기 펜 주 조선족 동포협회 맴버들, 가운데줄 박회장

박영애 초대회장은 동포협회 임원진들을 리드하여 조선족들에게 필요한 영어 반, 컴퓨터 반을 꾸렸고 미국변호사를 초청해서 상해보험에 대한 상식과 대처방법 등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기획하였다. 

아울러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의대 의학교수들을 초청하여 건강관리 강좌를 열고 수차례나 무료 건강검진을 진행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방암, 자궁암, 전립선, 골다공증 등을 검사 받게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조선족들의 미국 정착에 필수적인 것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고 연고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 주기도 했으며 누군가 갓 입주한 조선족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즉시 쌀포대와 야채 등을 한가득 준비해서 찾아 갔다. 

박회장은 초대회장에 이어 제2대회장을 연임하면서 4년동안 발 벗고 나서서 열정적으로 펜 협회를 위해 봉사하다가 때가 되여 바통을 넘기려 하였지만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2년 가까이 회장직을 더 연임하게 되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전미 조선족 동포협회와도 긴밀하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두 협회는 운동대회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서로 적극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다.

뉴욕 전미 조선족협회 운동대회에 참가한 펜 주 협회 회원들

그가 펜 협회를 위해 봉사하는 동안 인근의 조선족 동포들은 필라델피아를 “타향에서의 제2의 고향”으로 간주하였고 동포회관을 “우리들의 친정”이라고 정답게 호칭했다. 또 박회장을 “사랑의 천사”, “유학생들의 이모”, “조선족의 대모”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한편 그는 중국에서 정부인원이나 학자, 교수, 작가, 각종협회나 단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필라델피아를 방문할 적마다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댁에 모셔와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 친선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박원장이 연변의 유명인사들을 맞이하며 ‘친선대사’ 역할을 한 사적이 여러 신문에 실렸다.  

그 중에는 2006년에 11월에 방문한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 2007년에 방문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신만호 대법원장과 검사, 사법기관 고위층 간부, 병원장 등이 있다. 또 2008년 연길 박람회 투자 유치단을 거느린 연길시 부시장 황성민, 2011년에 방문한 조글로의 안승룡 회장과 김삼 대표 등이 있으며, 연변대학 평생교육원 분들도 있다. 그런 소식들은 미국주재 중앙일보, 동아일보, 뉴스 코리아, 국민일보 등에 실리기도 하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타향에서 친선대사의 역할을 다 해

2009년에 박원장은 후배들이 미국에 유학을 와 더 넓은 학문세계에서 꿈을 키워가게 하기 위하여 ‘대미 창구’ 역할, 즉 친선대사 역할을 다 했다.  

그는 ‘연변대학 미국 펜실베니아 주 사무소 소장’직을 맡고 학생들에게 미국 영어 연수와 유학을 알선해 주면서 미국대학과 연변대학과의 상호교류를 위한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였다. 그는 또 “재미 연변대학 졸업생 장학재단을 마련하고자 여러모로 애써 시도해 보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일을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아쉬워 했다. 

2010년초에 박원장은 뉴욕 제1대 조선족동포회 초대회장인 최동춘씨가 운영하다가 넘겨준 “조선투데이”(2000년에 발족)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보다 훌륭한 미주 조선족동포사회의 온라인시대를 열어 가고자 그는 선뜻 거금을 투자하여 인터넷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조글로 김삼대표와 중미 인터넷 네트웍 협의 체결 및 주성화박사 등과 함께

2011년 4월에 그는 “조글로” 김삼대표와 안승룡 회장과 함께 중미 조선족사회를 인터넷으로 네트워크 하는 콘텐츠 교류, 이벤트 공동주최, 인적 물적 교환 등 상호 협력을 추진하기로 협의를 체결하였다. 이어 2012년 4월에는 일본 “쉼터-재일 중국조선족 커뮤니티”와 콘텐츠교류, 프로젝트 공동추진을 골자로 하는 ‘국제 조선족 연대 강화 협약서’를 체결하였다. 

일본 쉼터 김정남 대표와 (오른쪽 김광림교수) 국제 연대 강화 협약서 체결

그해 5월에 그는 미 동부 젊은이들을 상대로 “조선투데이” 첫 회원모임을 열고 박사, 교수들을 초청해 미국 정착 경험담을 비롯하여 학업과 진로 등 문제들을 교류하는 장을 펼쳤다.  

조선 투데이 첫 회원 모임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이외의 사고로  박원장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온 “조선투데이”는 안타깝게도 큰 아쉬움을 남긴 채 우리 이민역사속에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박원장은 “아쉬움은 남지만 젊은 세대들이 다시 우리 재미 동포들을 위한 새로운 웹사이트를 개발하기를 희망하며, 그동안 소장하고 있는 모든 이민사 재료들을 기꺼이 헌납하겠다”고 말했다.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아 행복하다”는 박영애 원장 

“우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했다. 박원장은 그동안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해준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였다. 그는 태평양을 넘나들며 모교에 사랑의 기부금을 기증하며 필라델피아와 연변을 잇는 친선대사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97년에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모교인 길림성 교하시 외곽에 있는 가난한 신잔진 조선족소학교에 인민페13.000원을 기부하여 학교 중간 체조시간에 쓰는 음향설비, 라디오 등 전자설비들과 기타 기본시설을 바꿔주었고, 그 다음해부터는 3년간 연속 기부금을 보내 주었다. 

소학교 모교 전재현교장이 보내온 감사 편지들

전재현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학교측에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신잔진 조선족중심학교 박영애 장학금 기금회 장려제도”를 세우고 우수 학생과 우수 교사들을 장려하며 학교의 발전에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2001년에 조선족 학생들이 적어져서 모교가 폐교되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4년동안 모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면서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지체없이 연변적십자회를 통하여 도문시 월청 중학교와 연변1중에 각각 인민페 만원 씩 장학금을 조달하였다.

2006년 11월에 김병민 총장을 비롯한 연변대학 대표들이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여 박원장을 만났을 때 그는 모교인 연변대학에 장학금을 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말씀드렸다. 

2007년 박영애 원장이 연변대학 건축기금과 ‘박영애 조학금’으로 10만원 기부

2007년 9월에 그는  연변대학을 직접 방문하여 김병민 총장에게 인민페 10만원을 기부하여 ‘연변대학 박물관 건축기금’과 ‘박영애 조학금’을 조성하는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었다.       

북경에 있는 국가급 문화유산인 거액의 부동산을 증정 

2009년 10월에 그는 연변대학 건교 60돐을 경축하여 북경에 있는 국가 급 문화유산인 거액의 부동산을 사심없이 연변대학 건교 기념선물로 증정하였다.

“박영애 조학금”은 매년 ‘가난하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난 학생’ 10명에게 2012년까지 줄곧 조달되었다. 이에 연변대학 장학생들과 학교로부터 감사의 편지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수없이 날아 왔고, 이메일, 위쳇 문자들을 수없이 받으며 그들과 끈끈한 네트웍을 만들었다. 

그는 기자에게 연변대학의 한 장학생이 보내 온 짧은 메시지 하나를 보여 주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온 저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꼭 성공하여 불쌍한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 이었습니다. 지금 저에게 아름다운 꿈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더 크게 성공하여 장학재단을 세워 저처럼 가난한 대학생들을 돕겠습니다.” 

“저의 작은 사랑이 학생들의 귀중한 꿈을 키워 줄 수 있고 학습에 보다 큰 원동력이 된다고 하니 큰 감동을 받았다”며 “제가 드린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얻은 것은 백배천배 더 많아서 저는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은 행복한 사람이다”고 감격에 겨워 하였다. 

2011년 5월에 그는 또 연변예술학원 음악청에서 열린 ‘연변대학 와룡예술단 성립대회’를 맞이 하여  연변대학 교육기금회에 인민페 7만원을 기부하였다.

교육기금회 서수길 주임등과 함께, ‘연변대학 와룡예술단 성립대회”에 7만원 기부

그는 “모교에 장학재단을 만든 일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며, 이에 삶의 보람과 가치를 느낀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분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또 많은 것을 배웠다”며 감명 깊게 말하였다.

김병민 총장이 박원장에게 감사패와 연변대학 명예교수증 증정

2010년 4월에 연변대학에서는 박원장을 학교로 초대해 감사패를 증정하고 명예교수 위촉장을 전달하면서 “미국과 중국에서 후계자 양성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항시 고향 연변을 잊지 않았다. 특히 소학교, 대학교시절의 모교를 마음에 품고 고향의 교육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연변대학 역사에 아름다운 “기부 천사로” 이름을 남겼다.  

자녀교육은 이국 타향에서 선행해야 할 급선무 

박원장은 어린 딸들에게 우선 정체성을 심어주면서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었다.

큰 딸 혜영(87년생 )이는 세살 때에, 작은 딸 혜명(88년생)이는 한살 때에 미국에 건너와 영어권에서 자라 난 중국 조선족 1.5세들이지만 우리 말을 유창하게 잘 할 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잘한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한인 2세들이 영어만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그는 딸들이 대여섯살 되던 해부터 6년동안이나 주말마다 필라 지역에 있는 한글학교에 보냈다. 가정에서는 그때 그때 연령 특점에 맞는 우리 말로 된 동화책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었고 중고등학교 때에는 한국 대중가요나 한국 드라마를 통하여 한국 문화를 알게 하고 집에서는 꼭 조선말을 하게끔 엄하게 가르쳤다. 

“애들이 자기 민족언어를 알아야 부모세대와 정서적으로 보다 깊은 감정을 교류할 수 있고 우리 문화와 습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박원장의 주장이다. 

딸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또 중국어선생님을 초빙하여 집에서 중국어를 배우게 하였으며 여름방학 때면 아이들을 중국에 보내 중국어도 배우게 하고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도록 하였다. 

미국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자립심을 키워주고 18세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다. 

박원장은 큰 딸애가 소학교에 들어 가면서부터 자명종을 두 번 설정해 놓게 하고 스스로 아침에 깨여 나기, 스쿨버스 타러 혼자 집을 나서기, 동생과 함께 방과 후에는 먼저 방청소를 하고 숙제하기,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장보고 오면  딸들이 냉장고에 정리하여 넣기 등 어려 서부터 작은 일상 생활가운데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게끔 이끌어 주었다. 

미국은 스포츠에 열광하는 나라로서 다양한 취미생활들은 대학입시에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박원장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잘 안배해 가면서 여러 방법을 대여 딸들을 발레학원에도 보내고 탁구 등 스포츠를 다양하게 배우게 하였다. 하이스쿨에서 두 딸은 ‘필드하키” 학교 팀 선수로 활약하면서 큰 딸은 방어 수, 작은 딸은 공격수가 되어 동양인 자매선수로 인기를 끌었다. 작은 딸은 또 학교 ‘라크로스’ 대표팀 주장이기도 하다.  스포츠 뿐 만 아니라 그는 또 딸애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선택하여 배울 수 있게 취미생활 범위를 넓혀 주었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을 평가할 때 학교성적 못지 않게 리더십과 사회 봉사정신을 중요시 한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박원장이 펜 협회를 창설하고 리드하고 봉사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는 연변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도움과 성원을 받은 데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한국 양로원을 딸들에게 소개 시켜주었다. 그리하여 딸들이 정기적으로 양로원을 찾아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필요한 도움도 드리는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딸들은 스스로 알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수학 등 과목도 가르쳐주고 숙제를 도와주는 봉사활동들도 찾아 하였다. 

큰 딸 혜영 양은 연변 중의학을 계승 발전시킬 믿음직한 후계자

큰딸 혜영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필라 로워모어랜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니아 주 주립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년동안 대학교생활을 하면서 보다 성숙된 자세로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엄마의 뒤를 이어 연변중의학을 계승 발전시킬 장하고 큰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

엄마의 바통을 이어 받은 큰 딸 혜영이와 함께

그는 대학교 2학년 때에 중국에 있는 상해중의약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중의학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다행히도 중학교 때에 배웠던 중국어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미국에 돌아온 그는 3년동한 동양의학을 공부하고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한후 본격적으로 엄마를 스승님으로 모시고 연변한의원에서 한의사의 길을 걷고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침구는 신비로운 치료술을 보여주는 대체의학으로 인식되고있다. 침술과 중약이 대표적인 “자연요법”으로 몸에 부작용이 없고 그 우수성이 입증되면서 점차적으로 인기가 높아지고있다.

특히 2015년 10월에 중국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여 받은 도유유(屠呦呦)가 발명한 아르테미시닌(青蒿素)은 인류의 생명과학에 걸출한 공헌을 하였는 바 이는 중의학의 승리로서 중의학이 새롭게 세계 과학분야의 고도로 되는 중시와 인정을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중의학은 미국에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으며, 아세아인들이 자기들만의 특권으로 잘할 수 있는 유망한 직종으로 인기가 높아 가고있다. 처음에는 연변중의원의 환자 중 40%가 미국인들이었는데 지금은 70%로 증가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희망적이다

한문으로 된 약처방도 문제없이 알아보는 그는 한의학을 알아갈수록 흥취를 느끼고 있으며 엄마한테서 의술과 인술(仁术)을 동시에 배우고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들께 다가가 친절하게 상담하고 “미국에서 자란 요즘 애들 답지 않게 진한 약 냄새를 기꺼이 맡으며 성심성의껏 한약을 달이는 딸애의 진지한 모습에서 박원장은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못내 흐뭇해 한다.

미국에서 자란 혜영이는 스승이자 멘토인 엄마가 40여년동안 쌓아온 깊은 전통을 갖고 있는 중의약의 비법과 정수들을 고스란히 전수받으면서 2013년부터 미국에서 연변한의학을 계승 발전시키며 널리 전파하고 있다.

둘째 딸 혜명 양은 다재 다능한 조선족 1.5세

“혜명이는 제가 오래동안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보아온, 십년 만에 겨우 한 명정도 나타날 수 있는 기억에 남을 만한 뛰어난 학생입니다.” 로워모어랜드 고등학교 유태인 교장이 둘째 딸의 졸업에 즈음하여 박원장한테 건넨 칭찬이다. 

혜명이는 중학교때에 월반하여 고등학교때까지 줄곧 전과목 성적 A를 확보해왔다. 그는  배려심이 많고 리더십도 뛰어나 고등학교때는 아시아계 학생회 공동회장을 맡았고 필라델피아 인근 지역 7개 학군의 아시아계 학생회와 연합해 각종 행사들을 주관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코카콜라 장학금을 수여받기도 했다. 코카콜라 장학금은 매년 졸업을 앞둔 고등학교 학생들 중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특히 4년동안 쌓아온 리더십, 지역사회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를 평가하여 미국전역에서 5550명을 선정하여 수여하는 것으로 인기가 많다.

둘째 딸 혜명 양

그는 한국어,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비추어 뉴욕대학교 스턴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하였다. 맨하튼의 한복판에 위치한 스턴 비지니스 스쿨은 미국에서 톱 5위 안에 속하며 특히 금융, 국제경영 등 전업이 우수하다. 대학 4년동안에도 그는 해마다 학과점수 A를 따내어 학교에서 방학 때마다 무료로 제공해주는 세계일주 여행을 다닐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혜명이는 대학과정과 석사과정을 동시에 병행하여 금융, 회계학을 전공하여 2010년에 대학 졸업 3개월만에 바로 석사를 졸업한 후 그해 9월에 취직하였다. 세계 15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회계 법인이며 컨설팅회사인 뉴욕 PWS회사에 취직한 그는 5개월만에 회계사 자격증도 따고 고중시절에 쌓아온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금융, 회계학을 전공하고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2010년에 세계 15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세계 최대의 회계 법인이며 컨설팅회사인 뉴욕 PWC회사에 취직하여 고중시절에 쌓아온 네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근래에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미국 최대의 테크놀로지 및 미디어회사에 전근해 회사의 취지에 따라 전세계 도시의 삶의 개선과 번영을 돕고 있다. 그는 한층 풍부해지고 업그레이드 된 경험과 전공으로 세계금융과 경제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동포들의 믿음직한 건강지킴이 역할 다 할게요”   

박원장이 아메리칸 글로벌 전통의학대학 박사학위 취득

1990년에 미국에 온후 그는 중국 황산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으며 의학공부에 대한 깊은 탐구 열정을 지니고 아메리칸 글로벌 대학교의 전통의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또한 미국법에 따라 펜실베니아 주, 뉴욕 주, 메릴랜드 주 등 부동한 주의 한의사 면허(침술면허)를 취득하였다. 

그는 그동안 갈고 닦은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결부시킨 이론과 풍부한 임상경험을 토대로, 또한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환자들을 꼼꼼히 진찰하고 치료해왔다. 한약재 및 침술 시술을 통해 각DP종 질병을 치료하면서 날이 갈수록 조선족 동포사회와 한인사회, 나아가서 미국인들에게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박원장이 집필한 두권의 건강지킴이 한의학 서적

1994년부터 박원장은 리더, 동아일보, 국민일보, 선데이 토픽, 주간 필라, 뉴스 코리아 등 신문과 잡지 언론 매체에 근 15년간 건강칼럼을 연재하였다. 

2010년 8월에 그는 “박영애 원장이 들려주는 신 황제내경- 몸, 한방으로 다스려라”라는 한의학 서적을 출판하여 동포사회를 위하여 유익한 건강 정보를 제공해주고 든든한 건강지킴이가 되어 주었다.

연변대학 건축기금 마련 출판기념회에서 두 딸과 함께

한편 박원장은 연변대학 박물관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몸, 한방으로 다스려라” 출판 기념식을 성대히 열었는데 인근 각지 한인회대표들과 조선족동포 300여명이 참석하여 뜻을 모았다.

이날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이 축사를 보내와 “박원장의  아낌없는 성원은 연변대학교를 한층 더 발전케 하며 모든 연변대학 동문들에게도 큰 힘이 된다”며 “대회의 원만한 성공을 기원”하였다.

2018년 5월에는 그는 또 자신의 진료철학을 바탕으로 “오장육부를 말한다’라는 한의학 서적을 출판하여 동포사회를 위한 든든한 건강 길잡이 역할을 지속적으로 활발히 펼쳐 나갔다.

천사 같은 마음… 사랑과 기부의 원천

이민생활 34년간 줄곧 앞만 보며 줄기차게 달려오던 박원장은 이제는 연변한의원을 큰 딸 한테 맡기고 일주일에 두 세날 예약환자만 받고 있다. 

한의사가 된 지 벌써 10년이 넘은 큰 딸은 날이 갈수록 실력이 높아져 환자들의 깊은 신임을 받으며 침을 놓고 지압을 하고 부황을 뜨는 등 모든 치료를 독립적으로 진행하면서 연변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미국 이민 1.5세로서 영어권 환자 들과의 원활한 소통 덕분에 지금은 환자 중 미국인 비율 70%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박원장은 예전에는 필라델피아 한인 노인복지회에 찾아가 수년간 봉사활동을 했었는데 요즘에는 한달에 두세 번씩 큰딸과 함께 ‘중국노인활동중심’을 방문하여 건강관리 강의도 하고 무료로 진맥도 하고 침도 놓아드리는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주말이면 모녀가 함께 봉사활동을 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깊고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여러 한국 신문에 실린 박영애 원장의 사적들. 

언젠가 동네 한 할머니는 “딸이 얼마전에 직장을 따라 다른 주로 이사 갔지만 나는 박원장이 있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진지하게 얘기했었다. “늙을 수록 든든한 의사 곁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말은 듣는 순간 박원장은 “마음이 뭉클했다”면서 “의사로서의 책임감을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토로했다 

30년 넘게 연변한의원을 운영하면서 그 젯날 젊고 건강하던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하고 노쇠해 가고 병들어가는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면 “내 부모 내 형제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며 박원장은 서글픈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환자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단다. 설사 침 몇 대를 놓더라도 절대 쉽게 빨리 끝내지 않는단다. 그는 우선 환자들의 앓음 자랑을 내심 하게 들어주면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나서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상담해 드려 “연변 사투리로 ‘군이 뚝 떨어지게’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준 다음에야 침을 놓아 드린다”고 말했다. “먼저 마음이 치유돼야 침을 맞아도 덜 아프고 침 효과도 더 좋다”는 박원장의 진료 비법이다. 

얼마전에는 92세 되는 할아버지 환자 한 분이  진료를 마치고 돌아 가면서 “원장님, 악수 한번 해도 될까요?”하고 물으시기길래 박원장은 “그럼요” 하고 지체없이 덥석 노인의 두 손을 꼭 잡아 드렸다. 그 분이 다시 “원장님, 저를 한번 안아줄 수 있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으시자 박원장은 “당연하지요”하며 할아버지를 한참동안 따뜻하게 안아드리면서 “부디 건강하시라”고 재삼 말씀 드렸다. 그 분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고 “아, 오늘 내 모든 병이 시원하게 뚝 떨어졌다”며 흡족해 하시며 돌아가셨다고 한다.  

박원장은 “할머니를 먼저 저 세상에 보낸 고독한 그 할아버지가 며칠 동안이나 자꾸 머리에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져서 저도 모르게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그 분의 얘기를 하게 되더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큰 딸한테도 “앞으로 그 할아버지가 병원에 오시게 되면 꼭 엄마한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박원장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기자는 강한 마음의 울림을 느끼며 “아하!”하고 속으로 감탄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사실 기자는 박원장을 인터뷰하는 내내 “미국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력으로 힘들게 번 돈을, 설사 돈이 있더라도 어떻게 아낌없이 기부할 수 있었는가?”고 꼭 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얘기속에 이미 해답이 녹아 있었기에 구태여 물을 필요가 없었다. 

글을 맺으며

코로나가 터지면서 박원장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자 온라인으로 그림 그리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피아노를 처음 배워 볼 때보다는 뭔가 남는 것이 있고 적성에 맞는다”며 지금까지 4년정도 꾸준히 견지하고 있는데 아마추어 화백들 가운데서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    

박영애 원장이 온라인으로 그림 그리기 공부를 시작해서 그린 그림, “귀향 배”는 그의 고향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편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무언가 찾아서 즐겁게 배우고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의 삶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2018년에 연변대학 평생교육 일원으로 연변에 다녀간 후 팬더믹이후로 아직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지만, 고향에 다녀갈 계획은 갖고 있었다.

2020년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부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아틀랜타에 있는 ‘미동남부 중국조선족협회 정기총회 및 설날잔치’에 참석하여 협회분들과 함께 교류하고 정을 나누었다. 또 올해 3월에 있은 ‘대뉴욕조선족동포회’ 회장선거에도 참가해 동부지역 동포협회들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지하고 있다. 

박영애 원장이 동북향우회 이사회 상무부회장으로 7년간 활약중. 웃사진, 왼쪽 두 번째/아래 사진 앞줄 오른쪽 여섯 번째. 

지금 그는 펜실베니아 주 동북향우회’ 상무 부회장 직책을 맡고 2017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골프에 입문하여 현재 뉴욕 조선족 여성골프협회 이사장인 박원장은 동년배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고 활기차 보인다. 더욱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깊고 겸손하면서도 진취적인 그의 모습에는 인생 연륜이 묻어 나는 고상한 인격미가 고스란히 슴배어 있었다. 

연변대학 평생교육원 일원으로 이화여자 대학교 소정의 교육과정 수료식에서, 뒷줄 우 2번째

우리 민족이 40년 미국 이민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동안  박영애 원장은 재미 조선족 ‘친선대사’로 34년간 한결같이 나눔과 베품의 신조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여 오고 있다. 그의 인생 여정 전반에 흐르는 감동적인 동포사랑과 고향사랑 스토리들이 우리 민족 이주민들에게 오래동안 미담으로 전해지면서 미국 이민사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기를 바라마 지 않는다. 

이화옥 동북아신문 미국 특파기자
사진제공: 박영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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