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족들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 재일조선족연구학회 회장 정형규교수 인터뷰 / 길림신문 리홍매특파원

재일조선족연구학회 회장 정형규교수와의 인터뷰





“민족 : 조선족” 이라고 쓰는것이 일상이였던 시절에 그 단어의 의미와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절차이고 구분이라고 여겼을뿐. 요즘 여기저기 네티즌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되고 단일민족인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조선족》이라는 단어가 그닥 생소하지 않게 들린다.

일본땅을 밟은지 21년을 잡는 필자는 이 고유명사의 거침없는 울림이 반갑기만 하다. 挑戦族(조선족 일본발음과 같음)으로도 불리워왔다는 재일조선족인재들이 쌓아올린 탑과도 같은 오늘이다. 그런분들중의 한분을 만나려고 동경 스이도바시(水道橋)에 자리잡고 있는 니혼대학(日本大学)경제학부를 찾았다. 일본조선족연구학회 회장 정형규교수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균형이 잡힌, 어딘가 스포츠의 요소를 담고있는 건강한 교수님 모습이 환한 웃음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유년시절부터 일본어와 인연이 있어 1956년 네 형제자매중 막내로 훈춘현 훈춘진에서 태여난 정형규. 훈춘진교육국에서 근무했던 아버지의 사업관계로 소학교 3학년 후부터 한족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래서 친구가 대부분 한족이였고 조선족과 한족의 차이점도 별로 느끼지 못한채 고중을 졸업했다. 일본과 관련되여있었던 아버지의 사업관계로 발전한 일본의 모습을 남들보다 일찍 알게 된 그는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고중 졸업후 정형규는 6개월간의 하향지식청년시기를 거쳐 훈춘진식물유공장(珲春植物油厂)에 배치받았다. 얼마 안되여 간부제발로 량식국에 배치받은 그는 1977년 대학입학시험제도 회복의 혜택을 받게 되였다. 리공과 지망생이였던 그는 성적과는 상관이 없는 일본어시험도 택했다. 한때 중단되였던 입시제도때문에 자신의 레벨조차 가늠할수 없이 혼란했던 시기라 지망도 쓰지 않았고 가고싶은 전업은 더구나 선택할수 없었다. 자유로 선택했던 일본어시험때문에 동북사범대학 일본어전업에서 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1982년 대학 졸업후 할빈전공계기연구소( 哈尔滨电工仪表研究所 ) 정보연구실에 배치받은 정교수는 기계공업부, 무역촉진회가 주최하는 중일기술교류회의 통역과 자료수집 업무에 종사했다. 바로 그때 그는 일본을 깊이 알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일본에서의 류학생활은 순조로운 편이였다.

1896년부터 시작된 중국인 일본류학의 력사가 1946년에 저조기에 들어섰다.

1979년 장시기 닫혔던 정부파견급 류학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고 1986년부터는 자비류학생정책도 윤활성을 띠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문화에 익숙했던 정교수는 1986년 일본류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히로시마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민간단체의 장학금과 가와이쥬꾸히로시마종합교육센슈학교(河合塾広島総合専修学校) 비상근(非常勤)강사의 수입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행운이 그를 선택하는만큼 그 행운을 평범하게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그는 재학중  “류학생 일본어강연대회”에서 1위를 따냈고 “히로시마류학생장학금 론문모집”에서 두차례나 우수상을 받았다.

순조롭게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정교수는 1993년부터 히로시마대학 교육학부에서 일본어교육학과 조수, 종합학부에서 겸임강사로 있었으며 1998년 교육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2000년, 니혼대학 경제학부를 목표로 일본 각지에서 모여온 150여명의 경쟁자들속에서 유일하게 프레젠테이션끝에 진행된 교사진의 투표로 경제학부 조교수로 부임받았고 2006년에 교수직에 이르렀다

조선족으로 당당하게 나서기 시작한것은?

어릴 때부터 한족학교에 다녔던 정교수는 한어와 일본어보다 조선어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한다. 그래서 취재중에도 정확하게 전달되여야 할 부분은 꼭 일본어로 강조하였다. 1978년에 고향을 떠난 그에게는 특별한 민족의식이 거의 없었다. 불편함도 필요성도 없었고 주위환경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정교수는 그런 지신을 요즘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일본에 온 거의 십년간은 조선족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단일민족인 일본인들은 소수민족이라는 말을 생소하게 받아들인다. 조선족이라 하면 조선과 한국을 먼저 떠올린다.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죠?≫ 이런 물음에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56개 민족구성을 설명하기 시작하게 된다.

물론 흥미를 가지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첫 인사가 편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여 먼저 친숙해진후에 여러모로 설명을 하는 그런 방식으로 거의 십년을 지냈다. 그후 점차 일본인들속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해서부터 편하게 조선족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그러던 2005년 지인의 소개로  “제2차 재일본중국조선족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것을 계기로 정형규교수의 마음속에 깊이 잠들고 있었던 뜨거운 민족의식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세상 뜨실 때 아버지가 손에 쥐여주었던 족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였고 자신의 루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착수하기 시작한 연구테마가 “조선족의 다중언어(多言語)교육”이다. 연구항목의 신선함과 깊이를 파악한 정교수는 해마다 훈춘 등 중국조선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여태껏 미처 몰랐던 조선족의 풍속과 언어환경을 고찰하고있다. 요즘엔 조선족친구들이 무척 많아졌다고 너무 기뻐하는 정교수다.

한인 혹은 코리안 등으로 불리우는것보다 조선족으로 불리우는것이 더 정확하다

정교수는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족과 한인, 코리안은 전혀 다르다. 《조선족》이라는 언어는 중국에서 생긴 고유명사로서 중국국적을 가지고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갖고있는자를 말한다. 조선족과 조선민족은 다르며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사는 조선민족은 조선족이 아니다. 례를 들어 로씨야에 사는 조선민족은 조선계 혹은 한국계 로씨야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조선족은 자신의 신원과 존재의 의의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재일조선족에 대한 평가와 조언

조선족은 일본어능력이 상당히 높기때문에 일본사회에서 적응이 비교적 빠르다. 재일조선족은 이미 자신들의 독특한 커뮤니티 즉 공동체를 형성하고있다. 작년에 처음으로 조선족운동회가 열렸었는데 1500여명이 참가하여 여러가지 경기와 문예공연으로 친목을 다졌다.

우수한 인재들이 륙속 자신이 중국조선족임을 밝히고있으며 3개 국 이상의 언어를 장악하고있는 특점이 오라지 않아 조선족의 특권이 될수도 있어 그 가치가 날로 높아가고있다.

한편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로 뭉치여 지혜를 모으면 누구도 무시할수 없는 존재로 될수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속에 자리잡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족으로 한계를 느껴본적은 있는가?

딱 한번 느낀적이 있었다.

엄격한 서류심사와 면접에 의해 나고야스기야마죠가쿠인대학(名古屋椙山女学院大学)에서 거의 취직이 결정되였을 때의 일이다. 제일 마지막 단계인 향후의 사무적인 료해과정에서 그 대학의 중국인교원이 정교수에게 조선족이 아니냐구 물었다. 이름자에서 알아본것이 틀림없었고 구태여 속일 필요가 없었던 물음이라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결과는 리유불명의 불채용이였다. 중국어교원이라 조선족은 조건이 차하다고 판단하였다면 큰 오산이다. 정교수는 한족과 별로 다름이 없는 중국어권의 조선족이기때문이다.

재일조선족의 자녀교육에 대하여

이는 목전 우리 재일조선족앞에 놓여진 커다란 과제이다. 조선족 2세, 3세가 일본에 건너와서 조선족 혹은 한족, 일본인들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이 거의 조선어와 중국어를 모르게 된다.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치는것만으로는 아주 부족한 언어환경이다. 하지만 단념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납득을 하는 조건하에서 조금씩 조금씩 익히게 하고 커서 흥미를 가지도록 인도를 해주어야 한다. 조선어뿐만아니라 중국어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 조선족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조선족류학생 실태

1979년이후 일본에 류학온 조선족은 상당히 많다. 력사적인 원인으로 중국국내 대학교 일본어전업에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재학해있었고 그들이 일본류학을 택한것이다.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두번째로 많은 중국에서 조선족의 비률이 30%를 점했던 력사가 있다. 니혼대학(日本大学)에도 조선족류학생이 비교적 많다. 과거에 비해 3개 국 이상의 언어를 장악하고있는 조선족학생들의 선택범위가 훨씬 넓어진것이다.

조선족연구학회에 대하여

조선족연구학회는 그 전신인 “중국조선족연구회”를 토대로 2007년에 발족한 학술연구단체이다. 본 학회는 조선족에 관한 문화, 력사, 언어, 교육, 사회, 경제, 정치 등 여러 분야의 문제를 연구하며 나아가서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동북아시아지역내 각국간의 교류와 협력 및 세계의 평화적발전에 기여하는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원은 민족, 종교, 국적을 불문하고 조선족사회 및 조선족연구에 관심과 흥미를 갖고있는 연구자, 회사원, 대학원생, 대학생, 일반시민 등 다양한 성원들로 구성되여있다. 현재는 조선족연구자를 중심으로 하면서 일본인, 재일조선한국인(뉴커머도 포함), 재일중국인(한족)등 폭넓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있다.

앞으로의 목표는?

늦게 시작하게 된 조선족에 대한 연구이고 력사적인 인물들이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기에 산증인을 찾아 탐방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다그치고싶다는 정교수, 현재 일본학술진흥회에 과학연구비 신청을 계획하고있다. 사립대학인 니혼대학에서는 교원이 주인공인만큼 그래서 더욱 보람을 느낀다. 학생들의 모든 문제는 가르치는 교원이 책임져야 한다. 정년퇴직까지 남은 10년 동안 학생들 특히는 조선족학생들을 발굴하고 배양하는데 전력을 다하겠다는 정형규교수의 모습에서 그 왕성한 기력의 원점은 역시 학생들임을 느꼈다.

혈액형이 O형이고 취미가 테니스이며 일남일녀의 아버지인 정형규교수, 취재가 끝날무렵에 교수님의 연구성과에 대해 여쭈어보았다.

주요 연구항목은  “일본어교육시점에서 본 일중비교연구”, “중국어교육시점에서 본 일중비교문화론”이다.

현재 니혼대학 경제학부 전임교수외에 겸하여 쥬우오대학(中央大学)종합정책학부 비상근강사로 임명받은 그는 “일본현대중국학회” 회원,”일중교육연구협회” 리사, 학회잡지 <<일중교육론단>> 부주필, <<일본조선족연구학회>> 회장 등 중책을 맡고있다.

그리고  “중국인 일본어교육에 대한 고찰”, “일본어의 조건표현에 대한 연구”, “인과구절의 접촉형식에 대하여”, “한자권에 있어서의 외래어의 모든 형태” 등 수십편의 론문과 <<대학기초중국어>>, <<류의어의 뉴앙스>> 등 책자가 연구업적으로 평가받고있다.

어릴적에 어른들은  “뿌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참뜻을 늦게나마 깨닫고 깊이 새기며 대대로 뜻풀이를 해야 하는 우리, 교수님이 자주 언급하는  “아이덴티티”(존재의의)라는 말을 속으로 외우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우리 재일조선족은 밝은 앞날을 꿈꾸고있다!

/리홍매특파원

출처 :길림신문 2016.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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