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지킴이 – 일본에서의 조선족 전정선선생님을 만나다

우리 말 지킴이-전정선선생님을 만나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에서 우리 민족 만큼 뚜렷한 개성을 가진 민족은 흔치 않다. 세상 어디서든 만나면 한가족처럼 반가와한다. 같은 입맛에, 같은 노래가락에, 같은 춤사위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가 닮을 수 있는 리유는 바로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은 일본에서 우리 말 지킴이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전정선선생님을 소개하려고 한다.

벗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우리는 관광명소인 일본 우에노공원에서 재일 조선족녀성회 회장인 전정선선생님을 만났다. 일본에서의 조선족행사라면 빠짐없이 참가하고 항상 인자하고 환한 인상을 주었던 선생님은 그날도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개인에 대한 이야기보다 우리 녀성회와 샘물어린이학교 위주로 적어주세요.”

그녀의 첫마디였다.

공부 잘하고 꿈 많던 녀자애

6남매중 셋째인 그녀는 어릴 적 공부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 시절은 ‘녀자애는 손재간이 있고 알뜰해서 시집을 잘 가야지 공부 잘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류행했던 시기이다.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공부를 좋아하던 선생님은 대학입학을 갈망했지만 가정환경 때문에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녀야만 했다. 그렇지만 학구열이 끓은 선생님은 야간대학을 다녔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직장에서는 점심시간만 되면 책을 몰래 숨겨서 길 건너편에 있는 위생소 사무실에 들어가 가만히 읽군 하였다. “직장인은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공부는 무슨 얼어죽을 공부냐.”고 질책하는 상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우연히 천진이라는 대도시에서 잠간 생활하면서 마음의 눈이 밝아진 선생님은 나중에 꼭 경제가

발달한 상해에서 성장하리라는 꿈을 가졌다.



운명은 내 손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선생님은 상해에 가서 성장하리라는 꿈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은 자신만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준비된자한테 온다고 하였던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배운 영어와 한어 그리고 우수한 우리 말 실력으로 직장에서 직업교원으로 조선어문을 가르치면서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선어문 본과학과를 졸업했다. 그후 연길시 정부 공무원으로 종사하던중 상해에 전근을 갈 기회를 갖게 됐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꿈에 그리던 상해인지라 선생님은 무작정 떠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생경험도 쌓았고 인맥도 쌓았으며 성공의 첫 발판도 마련했다.



일본에서의 생활 그리고 새로운 도전

좋은 직장에 넓은 인맥으로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선생님은 또 새로운 도전을 구상했다. 바로 일본으로의 이주였다. 글로벌시대인 지금 일본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도 많이 늘었고 살기도 많이 편해졌다. 하지만 당시는 외국사람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나 전체적인 인문적, 현실적 환경이 힘든 시기였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특유의 끈기와 부지런함을 무기로 무사히 일본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기고 보니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일본사회에 정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특히 일본에서 출산하여 자식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의 정보 교류, 우리 언어를 모르고 자라는 2세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하여 선생님은 또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게 됐다.



재일 조선족녀성회, 샘물학교의 탄생

2008년 2월 10일, 일본의 조선족녀성들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 데 취지를 두고 녀성이 주최가 되여 일본사회에서의 취직, 사업, 육아, 친목 등에서 고민과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재일 조선족녀성회가 탄생한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고민은 일본에서 태여난 2세의 조선말 교육이였다. 하여 선생님은 녀성회 산하에 샘물학교라는 주말학교를 설립하여 어린이들에게 우리 글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중국에서 교원경험이 있었던 선생님들로 샘물학교를 구성하고 현재까지 9년째 운영되고 있다. 전용교실이 없어서 장소를 대여하여 격주로 수업을 하고 있지만 겉치레가 아닌 조선어, 한어, 영어, 음악, 전통음식 김치 만들기, 동화 들려주기, 우리 말 배워주기, 우리 말로 노래하기, 사물놀이, 한복 체험 등등 다양한 프로그람으로 운영되고 있다. 어린이들의 나이와 학습능력에 따라 4개의 학급으로 나누었다. 그외에도 어른들을 위한 자원봉사, 벗꽃놀이, 체육대회, 농촌생활체험, 력사탐방, 송년회 등 다채로운 활동을

조직해 우리 민족의 언어와 전통 지키기에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녀성회 회장이며 샘물학교 교장인 전선생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매끄럽게 치뤄질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 샘물학교에서는 80명도 더되는 어린이들이 우리 글을 배우고 있다. 전선생님은 왕복 4시간이나 전차를 타고 우리 말을 배우러 오는 학부모들을 보면서, 만나면 일본어가 아닌 우리 말로 인사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지난 3년 련속으로 샘물학교 소속 어린이합창단은 국제홍백가요전에 참가하여 중국어, 일어, 영어, 조선어로 노래를 불렀고 가장 큰 영예인 관광청 장관상을 비롯하여 퍼포먼스상, 룩킹상을 따내면서 3년간 우수한 성적을 지켜가고 있다. 또 녀성회를 선두로 일본에서는 조선족 커뮤니티가 형성되여 정보교류, 사업 및 창업기회교류 등으로 우리 민족의 일본에서의 활발한 움직임도 형성되였다.



10년의 결실, 밝은 미래

만시간의 법칙이라고 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만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이다. 만시간은 매일 3시간을 투자할 경우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10년간 한 우물만 판 선생님은 10년이 된 지금에야 즐기면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전에는 책임감으로 일을 한 적이 많았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한 회사에서 같은 일을 10년간 견지한 사람이 적을 건데 무보수로, 열정 하나만으로 10년간 자원봉사로 녀성회와 샘물학교를 이끌어나간 힘은 과연 무엇인가 여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삶의 의의라고 털어놓았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기를 원한다면 다른 길로 갔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다같이 즐거워지는 사회, 지식과 경험을 나누면서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자신의 힘을 보태고

싶은 꿈이 있기에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고 그만큼 세상 앞에 당당해질 수 있었다. 또 무한한 지지를 보내준 가족과 자원봉사로 샘물학교에 땀과 열정을 바친 선생님들께 항상 감사하다고 밝혔다.

10년간 운영된 녀성회와 샘물학교도 어느덧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한단계 더 밝은 미래가 보이고 있다.

“우리 조선족녀성들이 더 당당하게 더 행복하게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고 우리 어린이들이 류창하게 우리 말을 하고 우리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그때까지 더 노력할 것입니다. ”

선생님은 오늘도 달리고 있다.

사진/ 김권철

출처 – 연변녀성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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