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조선족]동경의 도민생활편의를 책임지고 있는 수도공정전문가 – 마홍철사장 / 흑룡강신문 문걸, 김권철

[편집자의 말] 흑룡강신문사 일본지사는 흑룡강신문사의 세계화전략의 일환으로 WeChat계정 [월드조선족] 카테고리에 일본의 각 분야에서 열심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평범한 조선족동포들을 취재하여, 중국전역 및 세계각지의 조선족동포들에게 일본에서의 생활상을 알려드리면서 보다 좋은 교류와 소통을 도모하고자 한다.



처음 선수로, 2006년에 창업하여 회사를 8년째 경영해온 조선족사회의 리더 중의 한사람인 마홍철(马洪哲)씨를 그의 회사에서 방문취재하였다.







(흑룡강신문=일본) 마홍철사장은 인터뷰중에 “나는 무엇보다 신용을 지키며 맡은바 일과 주어진 사업을 해왔다. 나의 하찮은 경험이 도움될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조언하자면, 확고한 인생목표를 설정하여 신용을 소중히 여기면서 아무리 힘든 일에 봉착하더라도 즐기는 마음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일본에 사는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아주 간단한 말인 것 같지만 그의 사람됨됨이와 인생철학이 담긴 인생관이 엿보인다. 그의 신용에 대한 확고한 태도, 성실함과 근면성도 인터뷰의 전반과정을 관통한다.





그도 그럴듯이 크나큰 인생의 전환점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목단강조선족중학교-고중재학시절에 큰 형님,형수님과 함께 작은 단칸 집에서 신세지면서 공부했던 시절이라고 한다. 초중시절에 퇴학까지도 당해왔던, 소위 좀 말썽부리던 “열혈청년시절”을 종결짓고 성급 모범학생간부까지의 길을 걷게 시작된 인생의 터닝포인트하고 자백했다.



외국인에 대해 보수적이라고 유명한 일본에서 그는 외국인으로서 아주 드물게 정부관련 사업을 하는 만에 하나 있을까말까하는 유니크한 케이스이다.



군계일학의 실력과 자타공인하는 인덕이 없이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창업단계에서의 몇몇 일본인 사장들로부터 받은 파격적인 제안 등 에피소드에서 가히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시종일관 솔직하고 겸손했지만 필자는 그의 눈빛과 어조에서 강인함을 느꼈다.



마홍철사장은 1966년 흑룡강성 녕안시 마현하향 려명촌에서 6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가족도 다가족이였다. 하지만 많은 조선족가족들처럼 당시의 어려운 환경에 못이겨 불행하게도 위로 남자형제 두분을 잃게 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시대배경을 보여주고 조선족들의 기구했던 처지를 말해주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학생시절의 마홍철”



그는 성동소학-녕안초중-목단강고중을 거쳐 빼여난 성적에 흑룡강성 성급 로동모범학생추천까지 받고 명문대학인 “할빈공업대학 정밀의기-기계제조공정학원의 정밀기계전공”을 입학한 우수한 학생이였다. 큰 형님인 마상철씨는 중앙정부의 최고인민검찰원에서 정년퇴직까지 근무했고 중한수교이후 줄곧 중한량국의 법률교류사업에 큰 공헌도 해왔다고 한다. 그의 부친이 고향에서 주임,대장,서기 등 중책을 맡았다니 그야말로 호부무견자(虎父无犬子)이다. 조부모는 일제시대에 함경북도에서 도문월청으로 이주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서 아내와 함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화목한 가정과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이주자의 손주가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실도

조선족의 아이러니한 처지와 동북아시아의 력동적인 력사를 말해주고 있다.



“중국 하해붐시대의 뜻있는 청년 – 마홍철”



그의 사회생활은 할빈공업대학을 졸업한 후 치치할제2기상장(齐齐哈尔第二机床厂)에 분배받은 근무부터 시작한다. 그뒤 그 시대의 뜻있는 많은 조선족들처럼 하해(下海)의 붐을 타고 천진의 큰형님,형수님이 경영했던 천진제일반점(天津第一饭店)의 조선료리점(재일교포사업가와 동업함)과 천진경제개발구-관리위원회에서 직영했던 서울술집(汉城酒家)의 점장, 정부산하기업인 천진개발구무역공사(天津开发区贸易公司)에서 무역담당 등 풍부한 하해(下海)경험을 쌓은 후, 1997년 (당시 31살)에 류학생자격으로 일본으로 류학왔다.



“일본에서의 파란만장한 류학생,회사원,창업자으로의 마홍철”



이듬해인 1998년에 “일본대학 리공학연구과 기계전공”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일본대학(日本大学)은 일본에서 회사경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교이다. 대학재학시 학비와 생활비마련을 위해 시작한 생계용 수도공정관련 아르바이트가 지금의 회사사업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다. 그의 “한 우물만 파는” 꾸준함과 뚝심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의 시간당 시급이 850엔인 시절에, 시간당 1,800엔이상 낮 로동으로만 13,000엔을 받아 월수입 40만엔을 벌었다고 한다. 2016년 현재에도 30대후반 40대초반 회사원들이 받는 평균수입에 가깝다. 지하에서 진행되는 수도공사일이여서 분명히 힘들었겠지만 아주 많이 번 셈이다.



일을 부지런히 한 덕분에,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취직제안이 들어왔다. 당시는 석사재학중였지만 담당교수와 상담하고 석사공부를 그만두고 2000년에 그 회사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



취직한 회사는 수도회사 4개, 경비회사 1개, 수도공정관련재료 무역회사 1개를 경영하는 업계내의 중견기업이였다. 그로부터 2대 사장밑에서 6년동안 근무하였다.



특히 근무를 시작해서 1년도 안되는 사이에 내부마찰로 사세(社势)가 기울기 되였다. 불행중에도 다행이 있듯이, 그 덕분에 근로자모집 등 관건적인 일들이 그에게 맡겨지기 시작되였다. 그는 중국계신문 등에 광고를 내서 구인을 전부 도맡아하였다. 5개반을 구성하여 한개 반당 5-6명씩 30명에 달하는 팀을 혼자서 관리하였다. 일을 잘해서 회사동료들로부터 마가군(马家军, 당시 유명했던 중국마라톤국가대표팀에 비유) 으로 불리웠다. 그에 반해 회사의 인사시스템이 보수적이여서 몇년이 지나도 일 잘하는 마씨 및 그의 부하들에게 보너스도 없고 공헌에 걸맞는 보수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아들도 갓 태여난지라 생활영위에 자금이 필요했다.수도국의 갑질, 주민들의 불만으로 인한 굳은 일은 마씨와 그의 팀이

도맡아했다. 가장 힘들다는 터진 수도물에 대한 해결사일 등을 포함해서 모든 굳은 일들을 도맡아해왔다. 힘든 일에 더해, 불공정한 인사,보수시스템으로 받은 심적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라 한시기 이름모를 불건강에 시달렸다. 고민끝에 그는 끝내 회사의 보수적인 인사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일본인 상사의 만류에 1년을 더 일하고 회사를 그만뒀지만 끝내 사직하고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사직하기 직전 3500만엔짜리 대형 공사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되였다. 일반적인 프로젝트가 700-800만엔이였던 당시에 엄청 큰 수주였다. 한달동안 공사를 잘 시작할 수 있게끔 준비해놓고 6년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금이 몇푼 없었는지라 회사원 시절 거의 망해가던 회사의 업무를 도와줘서 파산위기를 넘기게 했던 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다.



그 회사 사장으로부터 “월급을 주면서 일감을 주겼고 회사의 차량,공구 등 장비를 공짜로 제공하며 계약서도 대신 체결해줄 수 있다”는 약속을 흔쾌히 받고 본인밑에서 일했던 일본인 부하와 둘이서 거의 창업을 시작았다. 그야말로 설중송탄이였다. 물론 마씨의 평소에 음덕을 쌓아온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침 도와주는 회사에서 동경도 수도국 으로부터 6100만엔짜리 초대형공정프로젝트 일감을 수주하여 마씨와 같이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린 덕분에 여유가 생겨서 그 회사의 모든 장비를 렌탈하기로 하고 자영업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가을쯤에는 회사원시절의 다른 거래처였던 동경주변의 치바현(성급)의 수도공정회사로부터 직접 일감을 수주하여 독자적으로

처음으로 큰 일감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일을 잘 완수하였던지 그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마씨와 동업하여 창업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외국인 창업에 필요한 500만엔 자본금 중 그 사장으로부터 절반이상인 거금 300만엔을 투자받아서 개인자영업으로부터 명실상부한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을 시작하게 되였다. 투자해준 그 사장은 현재 치바현관공사조합(千葉県管工事組合) 리사장을 맡고 있으며 치바현의 관공사일의 절반이상을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두터운 신뢰관계가 형성되여 이 회사의 동경도에서의 일감은 거의 마씨가 총괄진행한다고도 한다. 물론 마씨의 창업도 줄돋 순풍에 돛단 격이 아니고 종업원들의 월급도 발급할 수 없어서 신용카드를 긁으가며 경영을 유지해왔다고 한다. 정식으로

창업하기전의 1년 자영업기간까지 하면 창업한지 8년이 되여 550평방미터에 달하는 자사빌딩 및 장비창고부지까지 준비중이라고 한다.



류동인구 2000만명을 자랑하는 국제도시-일본 수도 동경의 전반 수도공사의 재정비는 아직도 20-25년 더 소요된다고 한다. 뜻인즉 체불걱정이 일절 없는 정부의 일감이 줄곧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경영자로서 한달에 한번씩 회식을 하고, 매년 회사구성원들과 함께 국내외 관광지로 사원여행을 떠나 구성원지간의 친목을 다지고 소통을 강화한다고 한다.







또한 회사의 규모확대보다는 우선 모든 회사구성원들의 생활이 안정된 가족같은 문화가 살아쉼쉬는 회사경영을 지향한다고 한다.



“대회운영위원장으로서 1,2차 재일중국조선족운동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민족리더- 마홍철”



일본에 있는 각 조선족단체 및 협회의 리더들의 제안을 계기로 집단지혜와 공동노력으로 2015년부터 “재일중국조선족운동회”를 2년 연속 개최하게 되였다. 일본의 각 분야의 조선족동포들의 기부와 봉사로 개최된 “재일중국조선족운동회”의 대회운영위원장으로서 구심점이 되여 각 단체 및 협회의 리더들을 동원한 성과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공을 준비위원회 멤버, 봉사자, 일반 참가자 등 관계자들의 덕분이라고 시종일관 강조하면서 래년에도 더 훌륭한 리더가 추대되여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의 성실함에서 나오는 대의를 위한 겸손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실은 그의 정부를 상대로 하는 사업에는 일본국적을 따낸 것이 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세이기에 력사적인 아이러니컬함과 심적으로 껄끄럽다고 조선족 “마홍철”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했다.



아마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 1세대 조선족들의 정체성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고 고민일 것이다.



“일본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희망사항”



조선족단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분투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모든 단체를 유기적으로 련결하고 총괄운영할 수 있는 련의회(联谊会)형식의 조선족동포사무국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고, 합의가 된다면 솔선수범하여 응분의 기여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릴적에 스스로가 받았던 정규적인 민족교육학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말,우리 글,우리문화를 전수하는 주말학교운영에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 어머니 ”



그는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도 많았지만 살다보면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여 실망할때도 있고 한다. 어릴적엔 력사적 위인들이 존경의 대상이였다. 또한 어머님보다는 간부였던 아버지만 위대한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허리띠를 졸라매며 악착같이 가족생활을 영위해오신 어머니가 더욱 존경스럽다. 그 이유는, 어머니도 외할아버지와 똑같이 맏이였다. 아버지한테 시집온후에도 입쌀도 변변치 않았던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큰 형님을 할빈사범대학에, 큰 누님을 오상사범대학에, 둘째 형님에게도 숙사생활을, 둘째 누님에게도 농업중학교에 보내여 자식들의 공부뒷바라지를 다 해주셨다. 학비지불용 입쌀이 부족할때는 옥수수쌀로 입쌀과 물물교환하였고 엿도 만들어 팔아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주셨다. 그리고 목단강,연길 등 외지에 갈 때마다 무거운 짐을 메고 물물교환으로 가계의 수입을 증대해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볼쉐비크 공산당간부여서 거의 집안일을 돌보지 못한 상황이여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위대하게 느껴져 경의를 금할 수가 없다.”



그의 큰 외삼촌이 조선족의 큰 별, 위대한 주덕해선생의 수행경위원을 지냈다는 사실도 가히 그의 어머니의 훌륭함을 엿볼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부모님께 드리는 경의의 말씀”



현재 작년에 손자의 한국에서 있은 결혼식에도 참가한 정정한 88세 아버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타계하였고 한다. 생전에는 여건이 안되여 자주 못가봤지만 지금은 매년 아버지를 보러 고향에 간다고 한다. 그는 어머님에 대한 회한이 남는지, 눈물을 머그며 이런 말을 잔잔히 했다.



“효도는 생전에 해라. 살아계실 때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있는만큼 하면 된다. 출세한다음 할려면 이미 늦다. 주덕해선생의 수행경위원을 지낸 삼촌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주덕해선생은 정정한 년세에 타계한 아버님의 묘에서 비석을 꽉 쥐고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고 한참동안 앉아있다가 아무 말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아마 슬픔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회한들이 밀어붙여서였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속에 어머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도를 제대로 못한 회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내에게 드리는 고마움”



가족이 화목해야 사업도 잘된다. 그냥 모든것이 고맙다. 지지해줘서 고맙고 아들을 잘 키워줘서 감사하다. 다 사랑하는 아내의 덕분이다. 때론 유머로 넘기는 재치가 없는 남자여서 미안하기도 하다. 앞으로는 더욱 애처가가 되여 더욱 사랑하겠다. 사랑해 !



3시간에 달하는 심층취재를 마쳤다. 심층취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하는 사업이 뭔지도 몰랐고, 일본의 조선족동포사회에 대해 그토록 깊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소우주(小宇宙)하고 불리우는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 앞으로도 일본의 각 분야에서 일견 평범해보이지만 위대한 조선족동포들을 취재하여 전반 조선족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도록 노력을 경주해가겠다.



글:문걸 사진: 김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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